대학 동기들과 무주로 여행을 갔다. 무주. 무주는 영화 <이끼>의 촬영지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원지대인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 중 한 곳이다. 고랭지 배추가 자라며 겨울에 스키를 타러 가는 사람이 많다. 여기까지가 한국지리 시간에 배운 내용이다. 무주는 이 이상으로 어떤 감흥이 있는 지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과 동기들에게 무주는 좀 특별하다. 구짱이 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이다. 구짱은 우리 과 동기다. 1학년 때 과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짱은 1학년 때부터 우리에게 무주에 놀러오라고 했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우리는 서울을 너무 사랑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애들은 수도권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고, 서울서 자란 애들은 서울 밖으로 가면 뒤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아, 무주는 좀 먼데..." 라며 언젠가 한 번 가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만 했다. 그렇게 20대 후반이 되었고 그때는 모두 취직하기 바빴다. 시간이 흘러 이젠 서른이 되었고 무주에 가겠다는 약속은 무려 10년 동안이나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대학 동기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서 '무주에 가겠다는 약속이 10년을 넘겨서야 되겠느냐'는 움직임이 분연히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다. 이런 행사는 누군가 총대를 매고 진두지휘해야 일이 성사되는데, 우리는 총대를 발로 슥 밀어두고 먼 산 보는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를 후비며 '그래 이번엔 가보자~'고 대충 답장을 하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동기 중 한 명인 잉별이 총대를 사부작사부작 매기 시작했다. 날짜를 정하고 숙소를 잡고 돈을 걷었다. 올해는 가고 말겠다고 작정한 눈치였다. 우리는 또 누가 나서서 해주면 말은 잘 듣는 편이어서 보내라는 돈을 착실히 보냈다. 아마 다들 무슨 돈인지도 모르고 보내라니까 그냥 보냈을 거다. 잉별이 '고속버스 예매 열렸다'고 알림까지 주자 무주에 가는 게 실감이 되었다.
'무주에 가는 버스가 몇 대 없네. 10시 40분 차 자리 세 개밖에 안 남았다.'
가는 사람은 다섯 명인데 남은 자리는 세 개? 나는 매진임박과 티켓팅에 피가 끓는 한국인답게 바로 예매를 했다. 손이 먼저 움직였던 것 같다. 회사에서 일 시킬 때도 '자 앞으로 보고서 제출할 수 있는 사람 딱 세명~'이라고 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보고서를 작성해낼 것만 같다. 그렇게 순식간에 세 자리가 나갔다. 예매에 실패한 윤니는 '이거 우리끼리 경쟁해서 못 사면 낙오되는 서바이벌이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뭐 난 성공했으니 알 바 아니었다. 결국 윤니는 새벽 같이 ktx를 타고 대전에 내려 무주로 이동하기로 했다.
무주 여행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귀찮은 본능을 이겨내고 무주 여행을 추진한 잉별은 카톡방에 두서 없이 신남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다음주엔 무주에 있겠군'
'다들 가방 쌌니?'
'드뎌 내일 희희'
'신나'
신나는 대로 지껄이게 내비뒀다. 어차피 다들 저 할 말만 하는 카톡방이었다. 종종 '다진 마늘, 두부, 쪽파, 애호박' 하고 장 볼 거리를 메모해도 그러려니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신나'라고 쓴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잉별이 '얘들아...'로 시작하는 긴 카톡을 보냈다. 아, 쎄하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던 기시감이 들었다. 읽어보니 잉별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 가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왜 쎄함은 틀리지 않을까. 잉별이 무주에 얼마나 가고 싶어 했는지 알기 때문에 더 속상했다. 이 여행기를 빌어, 여행하는 동안 잉별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거라는 얘기를 참 많이 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렇게 나와 윤니, 구짱, 형이, 라니 다섯 명이 무주 여행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계획형 인간답게 여행 당일 아침에 일어나 "오오옥 가방 안 쌌어"라고 외치고 칫솔과 속옷 같은 것들을 잡히는 대로 가방에 처넣었다. 내 부산스러움에 석구도 잠이 깼다. 석구는 방 문턱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충전기는...? 고데기는...?" 하며 가방 싸길 도왔다. 얼추 가방을 싸고 나는 역시 계획적으로 고속터미널에 가려다가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남부터미널이어서 3호선을 타고 남부터미널로 갔다. 이 모든 게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해둔다. 예매 승리자들은 고속버스를 타고 1시쯤 무주에 도착했다. 구짱이 차를 갖고 대전에서 윤니를 픽업한 후 터미널에 우리를 데리러 와 있었다. 나이 먹고 여행할 때의 좋은 점은 무리 중 누구 하나는 면허가 있어서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누구 하나'가 내가 아니면 금상첨화다. 구짱은 우리를 차에 태워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얘들아 옆에 보이는 게 나제통문이라고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접했던 곳이야."
"우와~"
"왼쪽에 보이는 건 반디랜드야."
"우와~"
"설천면은 승려 9000명이 쌀을 씻느라 냇가가 눈처럼 하얗게 되었다고 해서 설천이라고 이름 붙었다는 유래가 있어."
"우와~"
"선녀가 왜 쌀을 씻어?"
"승려라고 선녀가 아니라..."
윤니는 벌써부터 가는 귀가 먹어서 큰일이었다. 구짱은 멋모르는 관광객들에게 지역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택시 기사님처럼 여기는 뭐고 이름의 유래는 뭐고 하며 떠들었다. 그렇게 무주 읍내를 지나 차는 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꼬불꼬불한 산 길을 30분 쯤 오르자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지?'
여행지가 무주라는 것 빼고 어딜 간다거나 뭘 한다는 정보는 딱히 없었다. 보아하니 내 옆에 애랑 옆옆애 애랑 앞에 애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희희헤헤 무주당 헤헤 하고 있었다.
"구짱 우리 어디가?"
"능이백숙 먹으러 가지~"
뭔가 돈까스 사준다고 하고 치과 데려가는 아빠 같아서 수상쩍었다. 백숙을 먹으러 산을 올라...? 어차피 가방도 트렁크에 있고 길도 모르니 구짱이 어딜 데려가서 내게서 뭘 털어가도 하는 수 없었다. 우려와 달리 차는 으슥한 곳이 아닌 사람이 많은 곳에 멈춰섰다. 여기는.. 여기는...
"계곡이다~~"
그렇지. 능이백숙은 계곡에서 먹어야 맛이지. 워터파크나 빠지보다 계곡에 능이백숙이 반가운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40~60대의 동년배들이 가득해 마음이 푸근해졌다. 구짱은 익숙하게 주차를 하고 '원조할매맛집'이라는 간판이 붙은 식당을 향해 소리쳤다.
"아빠!"
아빠요? 아니... 아버님을 뵌다는 말은 없었잖아... 나는 그제서야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여행에 따라왔구나 싶었다. 나는 나 몰래 준비한 깜짝 상견례에 초대된 사람처럼 쭈뼛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다른 애들도 비슷한 심정인 것 같았다. 다들 인사랍시고 무게 중심 못 잡는 사람처럼 대가리를 앞으로 꾸뻑거렸다. 서른이 되어도 친구 부모님을 뵈는 것은 참으로 어색하구나. 구짱의 아버지는 호방하게 손을 한 번 번쩍 들어 인사에 응하셨다.
"구짱아! 빨래 걷어라!"
구짱은 부모님과 대면한지 1초만에 일을 도우러 사라졌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일렬로 섰다.
"우리는... 어떡하지...?"
"글쎄... 구짱... 어디가써...?"
엄마 잃은 어린아이들처럼 가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차에 다시 들어가지도 못하고 계곡물에 뛰어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늘에 가지도 않고 뙤약볕에 멍하니 서있었다. 참고로 이 모임으로 말하자면 구짱 외 여러명으로, 구짱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애들이다. 구짱은 재수를 해 우리보다 한 살 많다는 이유로 대학생 때부터 우리의 어미새 노릇을 해왔다. 우리는 고깃집에 가도 구짱이 고기를 구워 접시에 놔줘야 먹는 애들이다. 버릇이 한참 잘못 들었다. 직장인이 되었어도 연필 말고 마우스 쥔다는 것 외에 달라진 게 없음으로 우리는 헛똑똑이들로 나이를 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코드가 입력되지 않은 로봇들처럼 구짱의 지시 없이는 어떤 결과값도 도출하지 않고 있었다. 구짱은 빨래를 걷고 8번 테이블에 김치전까지 나르고서야 우리에게 왔다.
"나 따라와!"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강 건너는 오리 가족처럼 구짱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계곡 옆의 평상에 앉았다. 계곡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놀기 좋아 보였다. 물가를 따라 빨노초파 파라솔이 더덕더덕 꽂혀 있었고 반쯤 물에 잠긴 돗자리 위에서 사람들이 배를 까고 놀고 있었다. 계곡 좌우의 돌벽을 따라서 우리가 앉은 것과 같은 평상들이 아슬아슬하게 하지만 악착같이 매달려있었다. 구짱은 우리를 앉힌 뒤에 부산스럽게 밑반찬이나 소주, 맥주, 수저 등을 날라왔다. 우리는 구짱이 올 때마다 "어유 우리가 뭐 도울 건 없어?"라고 일어설 듯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그뿐이었다. 구짱이 "괜찮아 앉아있어!"라고 하길 기다렸다는 듯 "그으래...?"하고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길 서너번, 마침내 그것이 나왔다. 능이백숙. 능이백숙은 어딘가 까무잡잡했다. 라니는 젓가락으로 닭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거 오골계 아니냐?"
"아니야 오골계는 진짜 새까매. 이게 오골계인가 아닌가 헷갈리지도 않게 까매. 여섯시내고향에서 봤어."
서울 촌놈들은 이게 꺼먼 닭인지 흰 닭인지도 모르고 먹었다. 맛있으면 된 거였다. 아 물론 구짱이 팔을 걷어 붙이고 닭을 툭툭 뜯어 앞접시에 덜어준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지역 특산품이라는 구천동 생막걸리도 한 병 홀짝홀짝 나눠 마셨다. 배부르게 먹고 나니 계곡에서 놀고픈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튜브를 몇 개 구해서 계곡에 들어갔다. 한여름이었지만 계곡 물은 차가웠다. 강물에 발을 담근 선발대가 눈이 둥그래졌다.
"후아아~ 후아~~ 존~나 차가워"
우리는 발목보다 더 들어갈 엄두가 안 나서 멀뚱히 서서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누가 발목을 칼로 써는 것 같은데?"
적합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차가운 물이라도 잠깐만 참고 물에 쑥 들어가면 곧 괜찮아진다. 똑똑한 나는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가슴까지 풍덩 물에 들어갔다가 "오우 쒸발"하고 물수제비처럼 튀어올랐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갈비뼈가 아팠다.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그래도 곧 적응이 되었고 형이도 나를 따라 물에 들어왔다. 하지만 구짱과 윤니, 라니는 마을 어귀를 지키는 장승처럼 다리까지만 물에 담근 채 꼿꼿이 서있었다. 윤니는 손까지 발발 떨면서 "나는 찬물 알레르기가 있어서..."하며 엉금엉금 물 밖으로 나갔다. 농담인 줄 알고 킼킼거렸는데 나중에 다리에 두드러기 올라온 거 보고 조금 미안해졌다. 구짱과 라니도 윤니를 따라 나갔다. 라니는 나와 형이를 보며 "너넨 통증을 못 느끼니?"라고 물었다. '얘네 뭐야...'하는 눈빛이었다. 나와 형이는 통증을 못 느낀다기보다 물놀이의 욕망이 고통을 잠식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명랑하게 돌아버린 눈깔을 하고 "희희 물이다" 하며 한 시간 가량 놀았다. 점점 형이의 입술이 보라색이 되길래 형이에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형이가 날 보더니 "어머, 니 입술 꺼먼색이야!"라고 했다. 아 내가 더 심했구나. 그때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형이에게 이제 나가자고 했다. 형이는 내 말이 안 들리는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비가 엄청나게 쏴아- 하고 많이 내리면 좋겠다. 그래야 낭만 있는데."
형이 말을 들은 듯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쏴아- 하고 내리기 시작했다. 형이는 비를 맞으며 말했다.
"와아~ 비다! 더 내려라! 더 내려!!"
순간적으로 형이 눈에 검은자가 안 보이는 것 같았다. "오우 미췬년..." 나는 나지막이 지껄이고 광기 어린 형이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우리는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숙소로 걸어갔다. 숙소도 어디 예약했는지 몰랐는데 계곡 바로 근처에 있었다. 먹거리, 놀거리에 숙소까지 남이 다 정해주니 너무 편했다. 패키지 여행의 맛을 알아버렸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숙소에서의 일은 (하)편에서 이어서 쓰겠다.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본 인삼 모형. 형이가 "야 화장실에 대형 인삼 봤냐?"라고 해서 "봤어! 나 사진도 찍었어!"라고 하려다가 형이가 "그걸 누가 사진을 찍더라고? 그걸 뭐하러 찍냐, 진짜 웃기지?"라고 해서 닥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