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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Oct 28. 2019

[글로그 29]10월 백수일지

10.1

백수가 된지 두 달이 지났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동생이 아침으로 치즈밥을 먹고 있었다. 치즈밥은 따뜻한 밥 위에 슬라이스 치즈를 얹어 녹여 먹는 것으로 마가린밥 상위호환 같은 거다. 효석인 내 뒤를 이어 백수 바톤을 터치하길 오매불망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바톤을 쉬이 넘겨줄 생각이 없다.



10.3

'잇선'이라는 웹툰 작가의 일기를 구독한다. 한 달에 7000원을 내면 일주일에 세 번 자신의 일기를 메일로 보내준다. 돈 없는 프리랜서 만화가의 일상이 주요 소재다. 읽고 있으면 '쟤보단 내가 덜 후지네...'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런 생각이 너무 후져서 코를 후비적거리게 된다.

오래하면 그게 뭐든간에 인사이트가 생기는 것 같다. 잇선은 프리랜서를 오래해서인지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인사이트가 상당하다.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문구가 많아 일부를 발췌해 보았다.



- 일어날 때는 조금 빠린해야 합니다. 조금만이라도 늑장부리면 아침부터 죽고 싶어지니까요.

- 외로움과도 싸우고 있지만 무기력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 시간관리가 잘 안 되면 또 그만 살고 싶어지니까요.

- 누구나 각자의 '정도 연구'가 필요하겠죠. 삶을 잘 운영하는 게 꽤 까다로운 일 같습니다.

- '귀찮아죽겠다 --> 막상 하면 한다' 대충 이런 반복으로 살고 있습니다.

- '나 혹시... 낮잠 잘 시간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3살 된 애기 보듯이요.

- 잔 다음 일어나는 순간에는 좀 지옥 같습니다.

-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별거 없고 "안 하면 끔찍해지니까" 합니다.

- 외로움과 우울증과 무기력은 거의 한 조직원이라고 보시면 되겠죠. 한 눈 파는 순간 장기까지 다 털어버리는 조직들이요.



'나는 소속감이 있는 게 낫더라'라는 말의 뜻은 아마 위의 사항을 못 견뎌한다는 뜻일 거라 생각한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으면 내 삶을 운영할 주체가 나밖에 없다. 운영자도 나고 노동자도 나여서 노사갈등이 나면 소위 나와의 싸움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평화주의자고 지는 게 이기는 거고 하니까 주로 나와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자꾸 지다보면 인생이 망하니까 나 대신 내 삶을 운영해 줄 주체를 찾는다.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게 하고, 공부하기 싫어도 공부하게 하고, 열정 없어도 즙짜내서 일하게 하고 그렇게 강제로 삶을 굴려줄 곳에 소속되려 한다. 그때 느끼는 안정감을 소속감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



10.7

비바리퍼블리카 대표 인터뷰를 읽었다. 비바리퍼블리카는 토스 만든 데다. 그 사람이 한 말 중에 제일 좋았던 건 '나는 굉장히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아늑한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떠먹여 준 일 같은 사소하고 따뜻한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 추상적인 단어보다 더 사랑과 행복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추상의 언어는 생활의 언어로 풀어쓸 때 더 공감각적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10.10

스타트업 강연을 들었다. 나는 강연이든 박람회든 뭐든 '취준생'이나 '수험생' 같은 집단으로 싸잡아 엮이는 기분을 싫어한다. 뒤틀린 인성이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은 좀 다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강연에서도 그런 마음으로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러다 취준생의 애환 얘기가 나오면 다리를 풀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막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렇게 도도함과 공감을 오락가락 하는데 얼마 전에 베르나르 뷔페 전시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그들의 광기를 닮는 것이 두려운가 아니면 그들로부터 떨어져나와 외로운 것이 두려운가' 내가 두려워 하는 건 뭐기에 그렇게 오락가락했을까.



10.11

영이를 따라 미용실에 다녀왔다. 미용실은 좀 신비로운 곳이다. 미용실에 가면 조금 더 가볍고 경박하게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로 '언니'나 '자기'라는 호칭으로 시작되는 대화의 분위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나라 정세에 대해 토론하러 오는 게 아니라 머리에 볼륨을 주거나 유행에 맞게 색을 바꾸러 오는 곳이다 보니 그 가벼운 방문 동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오로지 내 치장에만 신경쓸 수 있는 그 속물적인 분위기가 그리워 가끔 미용실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10.15

요즘 중앙일보 온라인 채널에 칼럼을 연재하는데 이게 꽤 스트레스다. 나는 '무생채를 하다가 무말랭이를 만들어버렸다ㅎㅎ' 정도의 글을 쓰는 사람인데, 거기서 바라는 글은 '무생채를 하다가 무말랭이를 만들어버렸는데, 이로써 어머니가 그간 얼마나 정성들여 무생채를 만드셨는지 깨닫게 되었고, 이것이 사랑의 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도이기 때문이다. 즙 짜내듯 교훈과 옳은 소리를 짜내는 게 고역이다. "제가 직접적으로 교훈을 주지 않고 열린 결말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결말을 찾아가게 하는 건 어떨까요?"라고 개수작을 부려봤지만 편집팀에 씨알도 안 먹힌다.



10.16

우리 집에서 외가까지 10분 거리다. 가까워서 가끔 밥을 얻어 먹으러 간다. 오늘 저녁에도 외가에 가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가 왠지 궁금해져서 "할아버지 친구들은 주로 뭐 하고 지내요?" 하고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친구들... 다 죽었지!"

라고 했다. 그러곤 너무 재미있다는 듯 끼룩끼룩 웃으셨다. 70 이상만 할 수 있는 쪼크. 나는 한참이나 더 살아야 저런 개그를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늙는 것에도 분명 기대할 만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18

우리 모두가 우주의 기원과 천문학적으로 일어나는 물리·화학 현상에 대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모두들 어떤 일에 대해서든 화를 덜 낼 것이고, 덜 아등바등 할 것이다.



10.20

체크무늬 잠옷 바지를 입고 친구 JM을 만나러 갔다. JM은 "패션 피플이네."라며 "패션 피플은 원래 조금 알 수 없는 옷을 입으니까"라고 덧붙였다. 나는 JM의 말에 동의했다. 소위 '하이 엔드' 패션이 모인다는 패션쇼에 가면 아보카도나 멍게를 닮은 옷을 입은 모델도 볼 수 있다. 확실히 하이 엔드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분야나 하이 엔드 수준까지 가면 조금씩 '저게 뭐야'하는 느낌을 준다. 나는 그것이 인간이 자꾸 지겨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이 엔드의 지경에 이른 사람은 아마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몇 십 년 동안 그 짓거리를 했을 것이다. 그럼 그 사람은 그 분야의 대부분의 것들이 빠르게 지겨워질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새로운 변주를 시도한다. 그 조금씩이 모여 종국엔 평균을 훌쩍 뛰어 넘는 수준의 이상한 결과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에 몰두하고 그 분야의 정점을 향해 갈 수록 점점 더 적은 사람들만이 나를 이해해주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러다 외골수가 되고 그 외골수들이 모여 그들만의 리그가 탄생하고...



10.21

면접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 입으로 내 자랑을 너무 많이 하다보면 겪게 되는 현상이랄까. 특히 "자신있어요?" 하는 질문에 대해선 난감하다. 스스로를 믿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아주 복잡한 심정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건 무조건 잘 할 수 있어서, 90% 이상 확신해서 뭔가를 시작한 적은 없다. 그냥 할 수 있겠거니, 해야만 하거니 믿는 수밖에 없다. 나를 믿어야만 하는 두려움은 절대 극복할 수 없고 언제나 안고 가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조금씩 속여 가며 "네, 자신있습니다!"하고 대답한다. 뒷 일은 차차 감당하기로 한다. 카드 빚 갚듯이.



10. 24

어떤 때에는 '아 그만 좀 울어. 어차피 내일도 힘들고 십 년 뒤에도 힘들어' 같은 말이 더 위로가 된다.



10. 27

3개월 동안 '이 즈음엔 취직이 돼야..' '이제 돈을 좀 벌어야...'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입사 확정 소식을 듣자 마다 '아 좀 더 놀걸...'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일을 안 하면 안 해서 불행하고 하면 해서 불행하니 어느 순간에도 지치지 않고 불행하기를 특기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아마 다들 그렇겠지. 쉬면 쉬어서 좋고 일하면 일 해서 좋은 사람이 있긴 할까.

출근을 앞둔 심정은 '내가 잘 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크다. 간간히 '시발 뭐 내가 뭐가 못 나서! 나도 다 할 수 있어!!'하는, 아무도 꼽 준 적 없지만 왠지 혼자 화나는 마음도 든다. 내 마음이 어떻든 간에 아무튼 열심히 해야 한다.



+ 전세로그 10. 27

허지웅이 스타워즈 피큐어 모으는 것처럼 나도 토토로 700만 원어치 모으고 싶다. 과장 정도 되면 20만 원짜리 토토로 워터 폴 가든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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