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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Oct 07. 2019

[글로그 28] 9월 백수일지

인간은 7시에는 절대 깰 수 없는 게 아닐까.

9.3

백수로 지내며 명심할 것은 늦잠을 잤더라도, 계획한 일을 못했더라도 '오늘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남은 하루도 미리 망해버리기 때문이다.


9.7

내가 산 기념품 중에 가장 잘 샀다고 생각하는 건 독일에서 사온 향할아버지다. 향을 피우면 마치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형상이 되는 나무 조각이다. 기념품의 역할 중 하나는 시간을 박제하는 것이다. 향할아버지는 독일에서의 시간을 박제한다. 때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당시의 시절까지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서투름이나 후회, 간지러움, 의문, 계절 등을 기념한다. 기념품과 기념인(?)의 다른 점이라면 여행지로는 다시 돌아갈 수 있지만, 그와 함께 보낸 시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시간을 찾아 나서야 한다.


9.10

- 기자님 요즘도 조제 호랑이 영화 좋아하세요?

- 응

- 근데 어떤 친구가 그러는데요. 걔는 츠네오가 이해가 안 된대요. 조제가 츠네오한테 말하는 장면 있잖아요. 옆집 남자가 자기 가슴을 만졌다고. 근데 츠네오가 그냥 가만히 있잖아요. '그랬어?'하고 말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거죠. 웬 아저씨가 사랑하는 여자의 가슴을 만졌다는데.

- 으음

- 그래서 걔는 그 영화가 싫대요.

- 음

- 저도 다시 생각해보니까 츠네오는 왜 그랬을까 싶더라고요.

- 음... 

-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나는...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적절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하지 않아. 영화가 올바른 방법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영화는 교과서가 아니잖아.


내가 영화에 대해 나눴던 대화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다.


9. 12

할 일이 없으면 시간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된다. 시간 위에 일이나 만남을 얹어 맛을 보는 게 아니라 생식을 하듯 아무 첨가물도 없는 시간만을 음미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도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시간 위에 뭔가를 얹으면 의미가 생기는 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괜찮은 건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다음 날을 맞이해도 되는 건지, 그렇게 얻은 다음 날은 대출로 받은 하루와 같아서 미래의 내가 청산해야 하는 건 아닌지, 혹은 현재의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내 다음 날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그런 것들과 전혀 상관없이 다음 날이 오는 건지.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시간을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은 너무 사치스러워서 이렇게 일기라도 써본다. 그 결과물이 글 한 쪽이라면 가성비가 너무 형편 없지만.


9.17

자기 전에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 다닐 땐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모든 것이 안온한 하루하루가 감사해진 걸까. 생각해 보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보다 더 불행해지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한 것에 감사드리고, 불경기에도 먹고 살 수 있어서 감사드리고, 잠 잘 집이 있어 감사드리고, 좋은 친구들과 때때로 만날 수 있어 감사드리고... 구석구석 소소한 것들에 감사드리는 이유는 이마저 빼앗아가지 말라는 호소다. 내가 이렇게 감사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그대로 내게 놔둬 달라는 소극적인 기도다. 언제 올지 모르는 불행을 이렇게라도 막으려는 보험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왠지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9. 20

막연히 낙천적일 수만은 없어 조금씩 불안해 진다. '이번 달 안에는 어떻게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7시에는 절대 눈이 안 떠지는 걸 보니 인간은 7시에는 절대 깰 수 없는 게 아닐까.


9. 22

내가 나답지 않은 것 같을 때 글을 쓴다. 아주 짧은 글이라도. 쓰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한동안은 나의 쓸모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된다.


9.26

나는 간헐적으로 성실하다. 성실은 긍정적 동기와 부정적 동기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긍정적 동기의 성실함은 큰 목표를 정해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발동하는 성실함이고, 부정적 동기의 성실함은 '오우 이러다 좆 되겠는걸?' 할 때 발동하는 성실함이다. 나는 후자다. 바쁘게 움직여서 불안한 생각을 밀어내는 것이다. 나중에 결과가 후져도 '나는 씨팔 최선을 다했다고!'라고 말할 명분이라도 만드는 작업이다.


9. 28

백수는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 어디에 소속되거나 일을 해서 얻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백수일 때는 정체성이 아예 없거나 '이런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겠군!'하고 희망하거나 '아.. 안되겠구나' 실망하는 상태를 왔다갔다 한다. 이는 굉장히 혼란스럽고, 정서적으로나 어떤 일을 계속 진행하는 데에 악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서류 통과'나 '면접 탈락', '가고 싶은 회사 좆도 없음' 등의 다양한 상태변화에도 굳건할 수 있는 정체성이 필요하다.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다.


9. 30

나는 삶이 불안할 때면 별과 우주에 대한 책을 읽는다. 거기엔 50억 또는 60억 년이 지난 후 있을 태양의 소멸과 내행성계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거대하고 오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나인 것이, 한평생 내 행복만을 위해 살게 될 것이 볼품 없게 느껴진다. 동시에 나의 생과 나의 불안 같은 것들이 비교적 작게 느껴진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나에게서 내 존재가 차지하는 비중을 줄인다.


+전세로그 10. 7 (월)

가재울 이자카야. 사진 색깔이 왜 이지랄인지 모르겠는데 맛은 지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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