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하고 저리해서 부산에서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사실 부산행 (상)편과 (중)편을 쓴 후에 출연자들에게 거센 저항을 받았다. 죄목은 펜 들었다고 친구들을 신나게 희화화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가장 희화화된 사람은 방광을 부여잡고 산 정상 화장실까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경보한 나 자신이다. 그러니 내 솔선수범을 따라 작품이라는 대의를 위해 다들 이미지를 희생해 주길 바라는 바이다. '니 글에 왜 내가 희생해야 하냐'는 컴플레인은 받지 않겠다. 아무튼 나는 굳은 신념과 의지로 이렇게 (하)편을 들고 돌아왔다. 마치 (하)편이 늦어진 이유가 내 게으름 탓이 아닌 척하며 시작해본다.
두 번째 날엔 서핑을 하러 갔다. 바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해운대 가까이 있는.. 광안대교를 건너가야 하는 어떤 바다였다. 마리는 서핑 피플들을 보며 한껏 격앙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와 형이는 횟집에 끌려온 고등어 같은 착잡한 마음이었다. 바다는 인구밀집도가 너무 높았고 저기에서 서핑을 하다간 파도가 아니라 사람들 머리통을 타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머리통을 세게 흔들어 끔찍스런 상상을 떨쳐내었다. 나는 서핑 하지 말고 튜브나 빌려서 놀자고 했다. 마리는 처음엔 민주적으로 의견을 들어주는 척하더니 "근데..." "아니..." "있잖아.." 하면서 교묘히 '서핑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편하게 의견 내라고 해놓고 결국 지맘대로 하는 팀장님이 생각나 잠시 눈에 살기를 띄었다.
아무튼 마리가 하자면 하는 것이었으므로 어느새 우리는 서핑 강습을 등록하고 있었다. 서핑복을 입은 우리는 흡사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어둠의 세력 1, 2, 3 같았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잔머리를 두세 가닥씩 늘어뜨린다든가 입술에 틴트를 바름으로써 조금이라도 청순해 보이려는 노력을 잊지 않았다.
어둠의 세력들은 순조로이 서핑 강습을 받았다. 오후 6시가 지나니 해수욕하는 사람들이 빠지고 서핑을 하는 사람들만 남았다. 혹시 그 광경을 본 적이 있는가. 구글에 '서핑'이라고 치면 뜨는, 웃통을 벗은 서핑 보이가 원통형 파도를 촤하악 가르는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보드 위에 일어서는 것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한 다수의 서핑 초보들이 보드에 배를 깔고 엎드려 나뭇잎에 붙은 송충이처럼 흔들흔들 거리는 게 주된 풍경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재미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녁 7시까지 그러고 놀았다.
마리는 중간중간 본인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나는 방수팩 안에 있어 잘 뵈지도 않고 터치도 잘 안 되는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눌렀다. 그러다 보면 내가 물살에 쓸려가 마리는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나는 열심히 헤엄쳐서 다시 마리 곁으로 갔다. 또 방수팩을 주물럭거렸다. 그럼 또 물살에 쓸려갔고 그럼 다시 헤엄쳤고 또 주물럭거리고 쓸려가고 헤엄치고 주물럭거리고 쓸려가고 헤엄치고 주물럭거리고 쓸려가고... 흡사 부잣집 딸을 따라다니며 공을 물어다주는 충견의 모습 같아 관둬버렸다.
우리는 네 시간 정도를 놀고서야 바다에서 나왔다. 샤워실에 가 개운하게 샤워를 했다. "야 우리 갈아입을 속옷 어딨냐" "그거 저기 있잖아 저기 저..." "? 저 어디" "...저어어기 차에 있네..." 그랬다. 차에 두고 왔다. 셋 중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무튼 이럴 땐 학사고 석사고 다 소용 없었다. 나는 그냥 속옷을 입지 말고 차에 가서 입자고 했다. "어쩔 수 없잖아! 그냥 아래 위로 시워언~하게 속옷 안 입고 가서..." "우리도 그 방법밖에 없는 거 아니까 좀 조용히 말해..." 의도치 않게 샤워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와 플랜을 공유 중이었다. 나는 시트콤에 나왔다면 눈치 없이 나대다가 구박 받는 전형적인 캐릭터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익숙치 않은 시원함에 조금 어기적거리며 차로 향했다. '팬티를 입고 싶다'는 일념에 우리는 말 수를 줄이고 걸음을 빨리했다. 차에 도착하자 형이는 나와 자신의 젖은 속옷을 둘둘뭉쳐 차 위에 올려놨다. 셋은 잽싸게 차에 타 열심히 들썩거리며 속옷을 입었다. 누군가 멀리서 차를 봤다면 수줍은 상상을 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서핑도 잘했고 결과적으로 셋 다 몸 성히 차로 돌아왔으니 그거로 됐다고 생각하며 세 결과론자들은 출발했다.
얼마나 갔을까. "ㅌ허어어얽!!!!!!" 뒷자석에 누워있던 형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으레 이런 상황에선 '왜 저렇게 놀라지?!!'하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또 뭐야...이제 그만 좀 하자..' 하는 탄식이 앞섰다. 형이는 쌍꺼풀 수술로 커진 눈을 한층 더 크게 뜨며 갑자기 창문을 내렸다. 그러더니 팔을 휘적이며 차체 위를 더듬거렸다 "ㅋㅓ허억... 큰 일 났다.. 이 위에 속옷 뚤뚤 뭉쳐 놓은 거 그냥 두고 출발했나보다.." 그랬다. 젖은 속옷을 차 위에 올려두곤 까먹은 것이다. 아마 속옷들은 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도로 위로 홀홀이 떨어졌을 것이다. 나는 브레지어가 뒷차 와이퍼에 걸려있는 풍경이나 바닥에 차례차례 떨어져 있는 속옷을 보며 누군가 '어느 미친년이 옷을 하나씩 벗으면서 간 걸까'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아끼던 핑크색 속옷 세트를 잃어버려 속이 쓰렸지만 형이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형이가 이 글을 보고있다면 조속히 34000원을 입금해주면 좋겠다.
마리네 도착하니 9시가 넘어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은 아구찜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는 전쟁에서 대승한 장군들처럼 거하게 먹고 마셨다. 회식이었다면 3차 까지 가야 섭취할 만한 양이었다. 자정이 넘자 우리는 핫식스를 하나씩 까고 보드게임을 했다. 셋 다 눈이 벌게서 손에 쥔 패를 보는데, 금방이라도 경찰들이 주부도박단으로 검거해갈 만한 비주얼이었다. 미래의 생명력을 끌어다 여행의 마지막 밤을 연장하고자 하는 발버둥이 눈물겨웠다. 내가 상상한 여행의 마지막 밤은 셋이 나란히 누워 서로 속마음도 터놓고 대충 우정을 돈독히 하는 모습이었는데 셋 다 눕자마자 워너원 콘서트 매진 되는 속도로 잠이 들었다.
이번 여행은 마리와 형이의 장점과 단점을 더 잘 알게 되면서도 동시에 그 장점과 단점 들이 무색해지는 경험이었다. 그 애의 어떤 부분이 장점으로 생각될라 치면 그 장점이 어떤 순간엔 단점이 된다는 사실이 기억나고 또 그 단점 때문에 겪었던 웃긴 에피소드가 떠오르면서 장단점의 구분이 무의미해 지고 결국 그냥 마리와 형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누군가 마리와 형이가 게으른지, 성격이 좋은지, 융통성이 있는지, 도덕적인지, 친절한지 등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모습들을 모두 봐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는 것은 어떤 때엔 '그렇기도' 하고 어떤 때엔 '아니기도' 한 모습들을 모순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한 것 같다.
마지막 날, 형이는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여행에서 찍은 영상을 앱으로 뚝딱뚝닥 편집했다. 그렇게 보니 세상 아무 사건 없이 무해하고 즐거워만 보였다. bgm에게 이 공을 돌린다. 나는 여행을 다녀온지 한 달이 지나서야 이렇게 글로 쓴다. '그래서 아주 웃긴 여름이었다'라고 글로 쓰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여름이 되기에, 그래서 아주 웃기고 아름다운 여름이었다.고 글을 끝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