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7년 8월 13일 Ⅰ 날씨: 비 냄새 나는 습식 사우나 날씨
홍보대행사에 다닌지 3주가 됐다. 홍보란 무릇 뭐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고 하나 확실한 건 말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대학생 때부터 알고 있긴 했는데, 일찍 안다고 더 좋은 선택을 하게 되는 건 아닌가 보다. 내가 홍보대행사에 들어간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나는 말을 잘 못한다. 그래서 내가 홍보대행사에 있는 것은 토끼가 사자 사이에 껴서 '누가누가 어흥이라고 잘 하나 대회'를 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나는 말을 할 때 뇌에서 많은 절차를 거쳐야 입 밖에 낼 수 있다. 법적 윤리적으로 옳은지, 젠더 감수성을 헤치지 않는지, 듣는 이가 좋아할만 한지, 분위기와 공기의 흐름에 어울리는지, 지금이 저 사람이 방금 말을 끝냈고 이사람도 할 말이 없어 내가 말하기 적절한 타이밍인지 등등. 까다로운 심판을 거쳐야 두어 마디 빵긋빵긋 할 수 있다. 또 다시 말을 하려면 용기가 충전 되기까지 쿨타임도 필요하다.
3주간 이 절차들을 무시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할 말이 생각나면 일단 지른다!'고 마음 먹었지만 전반적으로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팀장님이랑 대리님이 "내 생각은..." "이건 어때요..."하며 캥거루 싸움하듯 서로 펀치펀치 날리는 걸 열심히 구경만 했다. 대리 말에도 끄덕끄덕, 팀장 말에도 끄덕끄덕.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는 포용력이 거의 황희정승이었다.
나는 낯도 가려서 식당에 가서도 "제..졔가 할까..('요'는 묵음)?" "감사합ㄴㅣ..('다'는 묵음)" 같은 말을 나만 들리게 하곤 했다. 너무 은밀해서 첩보원인 줄. 저번주에는 나주곰탕을 먹었는데 대리님이 바르셀로나 얘기를 엄청 했다. 잡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아는 게 엄청 많다. 거의 곰탕 먹는 위키피디아였다. 아무튼 바르셀로나 얘기를 할 땐 어색하지 않아서 한시름 놓았다.
나도 똘똘하고 말도 또랑또랑하게 하고 식당에서 주문도 착착 하고 인사도 씩씩하게 하고 싶다. 다른 팀 신입들은 잘하던데 우리 팀장님은 나를 막내로 들여서 앞으로 얼마나 속이 터질까... 애잔해라... 뭐 다 저 팔자지. 어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