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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깔짝깔짝

운동을 안 하는 이유

by 빵떡씨
왜냐고 한 번만 더 물어보는 자아는 총으로 탕탕탕

이만큼 먹고 요만큼 움직인다. 요만큼 일하고 이만큼 지친다. 맥시멈이라 생각한 수치를 향해 몸무게가 빠꾸없이 후두두두 내닫는다. 싶어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다. 운동을 해서 나쁜 게 무어냐. 해두면 두루 좋다. 그래 해보자.

하지만 잠시 생각해본다. 세상에 '하면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운동도 하면 좋고 영어 공부도 하면 좋고 이란어도 배워서 나쁠 것 없고 폴댄스도 도움이 되고 쿠킹 클래스에 다녀도 좋고 터키식 치킨 샐러드 만드는 법을 익혀도 손해 없다. 세상에는 해서 좋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그래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지 않냐'는 생각이 제대로된 삶을 방해한다. 한국처럼 남들 하는 만큼 하고 사는 만큼 사는데 목숨 거는 사람들이 없다. 우리는 남들이 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만의 특별한 것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한다!

는 식으로 운동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이 난다. 다른 부분에서 이 정도로 논리적이려면 상당한 정성이 필요한데 합리화를 할 때만은 뇌가 어떤 신비로운 매커니즘을 돌려서 정신차려 보면 굉장한 논리가 완성돼 있다. 고든램지가 카스 광고를 찍은 것도 이런 매커니즘이었을까.

이 기막힌 매커니즘 때문에 난 무슨 일을 할 때면 이걸 왜 해야 하지? 왜 봐야 하지? 왜 배워야 하지? 왜 만나야 하지? 왜 가야 하지? 대체 왜? 왜? 왜?냐고 한 번만 더 물어보는 자아는 총으로 탕탕탕 쏴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짜증나게 물어대서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만다. 해야 할 명분 없인 찍 소리도 안내겠다는 굳건함으로 쥐새끼처럼 달려가는 시간을 바라만 보던 날들이었다.


뭔가를 원하는 순간 반드시 슬퍼지게 돼있어.

대학에 올라온 후부터 늘. 늘 그런걸 물어대서 늘 무엇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안 하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할 것처럼. 인생은 허무해서 뭘 하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나의 대전제였다. '우주적으로 봤을 때 유의미한 노력은 없다. 전 인류의 노력도 아닌 한 명 한 명의 노력은 너무 소소해서 우주 신이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른다.'

거기에 붙은 또 하나의 전제는 '노력은 고통'. 노력은 수지타산이 안 맞는 장사였다. 주로 밑져서 본전이었고 그럼 그냥 처음부터 본전인 채로 있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 그래서 애초에 무언가를 원하지 않으려 했다. 원하는 마음이 들면 머리 속에 수백의 연사들이 들이닥쳐 원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주장을 소리 높여 외쳤다. "원하면 노력하고 싶어져. 하지만 누구도 노력에 대한 보상을 보장해 주지 않지! 그러니 뭔가를 원하는 순간 반드시 슬퍼지게 돼있어."

이 노력만 끝나봐라 다시는 노력 안 한다

남들 눈엔 아무 생각 없어 보여도 나는 주로 이렇게 내 여러 자아들과 싸운다. 그러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니 역시 남들 눈이 정확하다.

탓을 해보자면 학교 다닐 때 노력을 잘못 배워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결과보다는 과정! 이라는 문장을 또박또박 외우게 하고 외운 과정 대신 결과로 치하하는 모순 속에 컸다. 애초에 노력의 목표도 원했던 것이 아니니 다들 씨발 이 노력만 끝나봐라 다시는 노력 안 한다 근데 다 돌려 받기도 전에 뒤지면 어떡하지? 하는 결과와 보상, 결과와 보상, 결과와 보상에 대한 강렬한 집착증세와 노력 노이로제를 갖게 됐다. 노력은 곧 희생! 고통! 슬픔! 그러니 노력은 최소한으로! 결과는 맥시멈으로!

시작은 언제나 즐겁고 이게 내 끝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

요즘 고등래퍼에 푹 빠져 있는데 어디 가서 고등래퍼 본다고 하면 삼류영화 좋아하는 취급을 해서 이제 덕심은 혼자만 고이 간직하고 있다. 고등래퍼를 보고 있자면 어렸을 때 소년감성 충만해서 봤던 원피스 같은 만화들이 떠오른다. 너 나의 동료가 되라며 같이 크루를 만들고 가사를 쓰고 공연을 하고. 그들이 하는 일련의 것들은 분명 노력인데 어거지로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 즐겁게 노력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처럼 그랬다.

그들은 여러 무대를 거치며 작은 성공의 경험치를 착착 쌓았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상한선을 체감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1등이 아니라고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각자의 길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으로 노력했다. 그 노력에도 분명 고통이 따르겠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고통이라는 점에서 감내하는 자세가 다를 것이다.

그들을 보면서 노력은 어쩌면 고통과 동의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은 우주신이 비웃더라도 생에 누릴 수 있는 큰 즐거움 중 하나일 수 있겠구나. 꼭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추구 자체가 삶을 끌어주는 원동력일 수 있겠구나.

고등래퍼 배연서의 <지향>이라는 랩 중에 '시작은 언제나 즐겁고 이게 내 끝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라는 가사가 있다. 누구나 이런 두려움 때문에 무언가를 추구하길 꺼린다. 하지만 시작이 즐겁다면 그것만으로도 노력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한다. 노력한 시간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미간을 찌푸려가며 아득히 세어봐야 할 때 즈음이면 애초의 목표와 고생, 성취, 지난한 세월 등이 뒤섞여 무엇이 즐거움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 이런 저런 노력에 대한 생각들을 침대에 누워 배를 긁으며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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