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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깔짝깔짝

갑분싸가 될 수도 있다는 각오

by 빵떡씨

나는 대학생 때 별명이 많았다. 놀려 먹기 좋은 성격이라 되는 대로 갖다 붙여서 부르는 애들이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십데렐라’였다. 10시만 되면 집에 간다고 지어줬다. 그래도 공주여서 속 없이 기분 좋았던 기억이다. 나는 띠, 띠, 띠, 띠이- 하고 현재 시각을 알려주는 방송처럼 10시만 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갑을 터는 소매치기처럼 재빠르게 가방을 낚아채 튀었다.

친구들은 클럽도 못 데려가고 술도 오래 못 먹는 써먹을 데 없는 나를 구제하려 많은 조언을 해줬다. ‘좀 대들어 봐라’ ‘이틀 동안 폰 꺼놓고 우리 집에서 자라’ ‘것도 안 되면 삭발을 하자. 가만 삭발 영상은 페북에 올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한 번쯤 친구들 말처럼 해봤을 법도 한데 그러지 못했다. 그 흔한 “제 인생은 제가 살게 내버려 두세요!” 같은 클리셰 멘트도 써먹어 본 적이 없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아빤 이렇게 나오겠지. ‘뼈빠지게 키웠더니 니가 나한테 어떻게! 온실의 화초처럼! 너한테 내 청춘을! 건강을! 이놈!’ 그럼 난 거기에 대고 ‘난 아빠의 소유물이 아닌데! 왜 구속을! 이제 성인! 자유!’ 라고 말… 하면 좋겠지만 실제로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나하느은ㅠ 아빠으이ㅣ 소유무리ㅠㅠ 아인데으흑ㅜㅠ”정도일 것이다.

난 좀 대들어 볼 마음을 먹으면 눈물이 그렁해졌다. 효녀와 가까운 삶은 요만큼도 살지 않았음에도 엄마 아빠가 상처 받는 게 무서웠다. 부모님은 몇 마디 하다 말고 오열하는 딸이 의아했고 나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일의 반복이었다. 자유고 권리고 매번 새삼스러운 열정으로 울어대는 것도 귀찮아졌다. ‘나만 일찍 다니면 가정이 편안할 것’이라는 전에 없이 화목을 중시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렇게 난 언쟁을 피하는 사람이 됐다. 뾰족한 말은 못 들은 척 뭉개고 편협한 논리는 좁은 틈으로 스르륵 빠져나갔다. 시비를 걸면 보란 듯 걸려 넘어져 데굴데굴 굴러주는 경지. 사실 언쟁을 잘하는 것보다 언쟁을 아예 만들지 않는 편이 살기 수월했기 때문에 난 큰 고난 없이 잘 지냈다. 미움 받을 일이 없으니 미움 받을 용기까지도 필요 없는 평탄한 인생! 짱이야!

회사에 들어가서도 그랬다. 일은 못하지만 딱히 거슬릴 일도 없는, 탕비실에 일 년 내내 있어도 있는 줄도 모르는 뽀또처럼 지냈다(뽀또 미안). 회사엔 크고 작은 실랑이와 누군가에겐 껄끄러웠을 일들이 있었다. 그래도 적어도 내 세계에선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칼국수 집에 갔다. 닭칼국수, 들깨칼국수, 옛날칼국수 종류 별로 시켜서 호로록 호로록 먹었다. 우리 팀 사원 김한솔은 그 주 주말에 일을 하게 생겨서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팀장님 진짜 얘네 양아치 같은 게 토요일에 보도자료도 배포해 달라 하고, 이벤트 당첨자도 취합해 달래요. 휴일인 거 뻔히 알면서”
팀장님은 끄덕끄덕했다. 나는 닭칼국수를 먹고 있었는데 국물이 맑고 닭육수라 맛이 특이했다. 음 이 집 잘하네.
“그리고 저 금요일에는 퇴근하고 행사도 참석해야 돼요. 거기 꼭 가야 하는 거에요?”
“…한솔 씨 나는 주말에 출장도 가. 그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갔다 와요.”
“네?... 아니 휴일에 일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는 일 못 하죠 팀장님”
“우리 일이 그렇잖아 쉴 때 쉴 수가 없어요. 휴식과 행복 같은 건 개인이 알아서 챙기자”
“그래도…”
아니 휴일에 일을 시키는데 휴식과 행복을 어떻게 챙겨… 나도 한 마디 거들까. 나는 닭고기를 젓가락으로 들었다 놨다 했다. 이미 분위기 좀 이상한데 내가 몇 마디 하면 갑분싸 되겠지... 칼국수 먹다 말고 언성 높이는 것도 좀 모양 빠지고… 나는 애용하는 위기 탈출법을 구사했다.
“와 칼국수 맛있네요!ㅎㅎ”

그날도 그렇게 잘 넘어갔다. 카톡으로 자꾸 회사 못 다니겠다고 찡찡대는 김한솔에겐 ‘이짜씩! 존버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낄낄거리며 대충 넘어갔다. 어떤 불만도 장난으로 받아 치는 기술. 문제를 문제가 아닌 듯 보이게 하는 무적의 전법이랄까.

그래서 난 다 괜찮은 줄 알았다. 김한솔이 진짜로 그만두겠다고 할 줄은 정말 몰랐다.

김한솔은 불만도 많았지만 그만큼 남의 하소연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사원들에게 불합리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알아채고 총대 매고 나섰다. 그래서 대표님과도 약간은 불편한 사이였다. 내가 멍텅구리처럼 내 연차도 제대로 못 쓰고 있으면 “빵떡씨 연차 언제 써?”하고 팀장님 앞에서 한 마디라도 거들어줬다. 그럼 난 몰랐던 척 교활하게 “아 참 연차 써야 하는 구나~” 했었는데. 아 좋은 시절 다 갔네.

나는 곱씹을수록 칼국수 집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 생각났다. 그것 때문에 김한솔이 퇴사를 맘 먹은 건 분명 아닐 텐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내가 한 마디라도 도왔다면 어땠을까.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는데. 왜 혼자 말하게 뒀을까. 김한솔은 결코 자신만의 이익이라고 할 수 없는 얘기를 하며 외롭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이런 순간들은 대체 얼마나 많았을까.

내 세계에서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정말로 상처 받지 않았으면 했던 사람이 상처 받는 걸 보고만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보다 더 소중한 게 있었는데. 좀 싸해져도, 좀 울먹거려도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나는 갑분싸가 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했어야 했다. 퇴사한다고 말하는 김한솔 앞에서 펑펑 울었지만 어느 시집의 제목처럼 운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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