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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깔짝깔짝

튜브의 선장

by 빵떡씨

'저자란 무엇인가.'
<한국이 싫어서>의 저자 장강명이 이 질문을 주제로 쓴 칼럼이 있다. 글쓰기를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것에 비유하며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동력선을 몰고 바다에 나가 무사히 항구로 돌아오면 그때 선장 또는 저자라고 불러준다.'
단행본 한 권 정도는 내야 저자라고 불릴 자격이 생긴다는 거다. 문장에서 엣헴-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은데... 그의 말에 따르면 나처럼 퇴근해서 블로그를 열고 '오늘은 무슨 욱낀 일이 있옷나..' 생각하다 몇 줄 적고 잠 드는 건 발목 정도 잠기는 물에서 튜브를 타는 정도의 일일 거다.

아무튼 뭐 누구를 저자라고 하든 잘 모르겠고. 장강명의 비유를 통해 길고 긴 글을 쓰는 이들의 심정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가 다 같이 바다에 빠져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다. 진짜 바다와 글자의 바다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이다. 글자의 바다는 절망의 바다다. 이 바다는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우리에게는 최종 도착지가 없다...(중략)...내가 더 멀리서 죽을 테다'
괜히 멋있어서 눈물 살짝 흘릴 뻔했다. 다행히 흘리진 않았다. 저자가 글을 쓰는 마음은 뱃사공이 세이렌에 홀린 마음과 비슷한가 보다. 목적 없이 바다로 바다로 간다고 하니. 어떤 작가는 글쓰기가 신내림과 비슷하다고 했다. 계시(?)를 받으면 쓰는 것을 의지대로 그만둘 수 없어서.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쓰고 싶고 그러다 정신차려 보면 무언가를 쓰고 있다고.


아... 글쿠나... .
나는 쓰다 죽을 것도 아니고 글로 굿을 할 것도 아니어서 고개만 꺼떡꺼떡 했다. 이쯤에서 자연스러운 궁금증이 생긴다.
나는 왜 글을 쓸까.
원양어선도 아니고 튜브인 주제에. 굳이 잘 보던 유튜브를 끄고 서비스로 얹어 주는 찐빵처럼 의자에 낑겨 노트북을 여는 건 어떤 알 수 없는 마음일까.

남들이 물으면 '글을 잘 써 인플루언서가 되어 회사를 뜰 것'이라고 농담인 척 말하지만 사실 내 욕망은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나는 주로 회사 욕으로 수놓인, 잡초도 못 자랄 만큼 영양가 없는 글을 쓴다. 그걸 브런치에 올리고 좋아요 하나 구독자 한 명 느는 데 희열을 느낀다. 소름끼치는 관종 디엔에이 때문에 앙증맞은 간으로 들킬까봐 조마조마 하면서도 글쓰기를 멈추지를 못한다. 하지만 나도 물론 알고 있다. '인플루언서는 될 수 없고 내 글은 나의 자손들마저 대대손손 외면할 것이다.'

잘 알면서 왜 계속 쓰는 걸까. 과거로 거슬러 가보았다. 내가 처음 글을 쓴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주변 친구들 모두 자유! 자아! 정체성! 청춘!을 외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나기에 나도 같이가! 하고 채 꾸리지 못한 배낭을 끌고 헉헉 뛰었다. 별 소득은 없었다. 물론 그 누구라고 소득이 있을리 없었다. 그저 그렇게 뛰었다는 데에 뿌듯해 하던 나이였다. 내가 그때 건진 거라곤 시를 쓰기 시작한 거였다. 누가 쓰는 게 멋있어 보여서 나도 따라 했다. 주로 그런 이유로 뭔가를 시작하던 나이였다.

그때부터 누가 뭐하냐, 취미가 뭐냐 물으면 '아 나는 글을 쓴다'고 말했다. 이거 참 쑥스럽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다 하는 느낌. 그럼 다들 뭘 상상하고 그러는 건지 아님 딱히 해줄 말이 없어 그러는 건지 오, 대단하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오, 대단한 줄로 알고 썼다. 노래 한다는 애한테는 노래 한 번 불러봐라 하지만 글 쓴다는 애한테 글 한 번 써봐라 하지 않았기에 나는 오랜 시간 글 쓰는 애일 수 있었다.

한 때는 쓰는 일이 내게 돈을 벌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취미로 쓴다는 애한텐 맨 입으로도 오, 대단하다,고 해주지만 돈벌이로 쓴다는 애한텐 번뜩 정신이 난 사람처럼 '아이구 너는 그거로는 망하고 만다, 대단하다 했던 소린 취소다 취소'하고 쌍수들고 말리는 세상이기 때문에 나는 빠르게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마음을 접고 나선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망하고 마는' 일에 쓴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망하진 않겠지만 크게 성공하지도 않을 일들을 열심히 했다.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이 살을 찌우고 비대해져 내 삶에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사는 데 불필요한 일들은 굶주리고 바싹바싹 말랐다. 나는 '필요'의 살집에 파묻혀 삶에서 필요를 뺀 나머지를 거의 볼 수 없게 됐다.

나는 필요나 생활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곳을 원했다. 그래서 글로 도망쳤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었다. 세상 별 일이고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희화화해서 썼다. 솔직하게 썼다. 나중엔 팀장님한테 혼나면서도 '이거 글로 쓰면 재미있겠다'하는 생각 먼저 했다. 주변의 일들은 그저 글의 소재였다. 영감을 받고 생각하고 객관화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일상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글 쓰는 건 나에게 가장 불필요한 옵션이다. 불필요한데도 계속 하기 때문에 내겐 가장 중요한 옵션이다. 비록 튜브지만 나를 생활 속으로 가라앉지 않게 해준다. 나는 튜브의 선장이다. 뭔가 약간 비장해 보이지만 사실 정말 비장하다.
내가 더 오래 부유하다 죽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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