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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글로그

[글로그 01] 봄이 오면 어떡하죠

들판을 뒹구는 봄날의 곰

by 빵떡씨

3월이 되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나는 원피스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새 원피스를 입은 내가 노랗고 하얀 봄빛을 맞으며 룰루랄라 뛰어다니는 상상을 한다. 어쩐지 내게 봄은 그런 이미지다. 인터넷 쇼핑몰을 너무 많이 구경한 탓이다. 3월이면 아직 쌀쌀하지만 난 3월부터 봄으로 친다(그래야 봄이 조금이라도 길어진다). 봄의 신호는 완연히 따뜻해졌을 때가 아니라 추위 속에 찾아온다. 겨울의 공기가 just 차가움이라면 봄의 공기는 포근한 차가움이다. 찬 공기에 따수운 해가 비쳐 조경수역이 된 느낌. 생선이든 인간이든 냉(冷)과 온(溫)이 적절히 섞여야 살기에 좋은가보다. 나는 코로 봄의 온도를 느낀다. 내게 코는 계절을 감지하는 더듬이 같은 것이다(콧구멍이 큰 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봄에 나는 향이 있는데 꽃 향기라기 보다 배 향에 가깝다. 시원하고 단 느낌.



4월에 가까워질 수록 세상의 채도가 슬며시 높아진다. (내 기분 탓인지) 사람들도 겨울보다 좀 더 뽀작뽀작 부지런해진다. 그런 풍경을 보고 있자면 스크래치 북이 생각난다. 어릴 때 스크래치 놀이 좀 해보셨는지? 노랑, 초록, 분홍 크레파스로 밑바탕을 마악 색칠하고 그 위에 검정 크레파스를 또 마악 색칠해 밝은 색들을 다 덮어 버린다(생각해보면 꽤나 중노동이었다). 그리고 동전이나 뾰족한 무언가로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 내면 밑에 깔린 밝은 색들이 드러난다. 봄도 그런 식으로 조금씩 제 색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인간들이 봄의 요정처럼 부산히 돌아다니며 회색을 긁어내 봄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물론 봄이 옴은 온전히 자연의 일이지만.



봄에 대한 감상은, 내가 표현력이 좋지 않아 '오우 개설레..' 정도로 출력되지만, 사실 표현되는 것보다 좀 더 미묘한 감정이다. 예컨데, 점심 시간에 잠시 산책을 나갔다고 생각해보자. 그 날 최고 기온이 영상 9도여서 코트를 허물처럼 벗고 싶게 따사롭다. 나는 봄기운에 간질간질 설레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다락방은 냉골처럼 서늘해진다. 초조함 때문이다. 길어야 두 달(체감 3주)인 이 봄을! 지금이 지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할 봄을!! 어떻게 하면 가장 봄 답게 보낼 수 있을지 조급해지는 것이다. 테라스에서 에이드를 마시면서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을까.. 한강에서 자전거를 탈까... 고궁을 걸어 다닐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듯 '들판을 뒹구는 봄날의 곰'처럼 살 궁리를 한다. 하지만 뭘 하든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 할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처럼, 봄은 그 한 가운데에 있어도 더 봄이고 싶을 테니까.



더 비참한 사실은 해 뜨기 전에 회사에 가 해 지고 나서 집에 가는 신세이기 때문에 들판을 뒹굴긴 커녕 빡쳐서 사무실 바닥을 뒹굴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춥고 더운 계절엔 나다니지 말고 회사에 처박혀 돈이나 벌자고 자기 위로라도 하는데요, 봄에 잿빛 사무실에서 일을 하자면 정말로.. 정말로... 가슴이 아픕니다. 올해도 봄이 오면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 한다발이다.



이런 이유로 봄을 생각하면 슬프고 행복하다. 영화 <싱스트리트>를 보면 사랑을 슬픈 행복이라고 하는데, 봄을 생각하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 문화 콘텐츠로 대리 만족해보는 봄



[MOVIE] 봄날은 간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와 "라면 먹고 갈래"로 너무 유명해서 추천하기도 애매한 레전드 영화. 제목 그대로 봄날(=인생의 좋았던 날)이 우리를 떠나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사계절을 함께 보낸 연인의 이야기와 치매 할머니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진행된다. 사랑했던 날들이 지나갈 때, 예뻤던 젊음이 지나갈 때, 봄날이 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벚꽃길에서 유지태가 이영애를 보내는 씬은 천장을 한 번 봤다 모니터를 한 번 봤다 다시 천장을 보게 만드는 먹먹함이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서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감성이 있어 좋다.



[MUSIC] 프롬 <너와 나의>


잘 쓴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 분위기와 시공간을 느낄 수 있는데 프롬의 노래가 그렇다. 지하철 안에서 프롬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우리 집이 4호선 종점이어서 지하철에서 한창 자면서 가고 있었다. 그러다 잠이 슬며시 깨서 눈을 떴는데 내가 탄 칸에 아무도 없고 앞 좌석에 햇살만 가득 타고 있었다. 그때 프롬의 <너와 나의>가 이어폰에서 나왔다. 인생에 가끔씩 동화적인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때도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고 새각한다. 나는 잠이 덜 깬 채로 가만히 있었다. '...네 어깨 위로 쏟아지던 해가, 눈부시다는 듯 하늘을 보던 너...'


따듯한 봄이었다.



[BOOK] 성석제 <첫사랑>


중학생 남자 아이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좋은 소설가는 마음을 들여다 보고, 들여다 본 자리를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사랑도 잘 들여다 보면 설렘 아래로 질투나 낯섦, 놀람, 서늘함 같은 마음이 있다. <첫사랑>은 그런 여러 겹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역시 봄엔 첫사랑 얘기지. 어떤 나이가 되어도 첫사랑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건, 소설가 최은영의 글에 나오듯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그때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린 마음들.






+전세로그 2019. 03.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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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첫 날. 가구를 다 배치하고 모온가 모호온가 이상해서 방을 계속 봤는데 화장대에 거울이 없었다. 신-박.


그래도 사진은 뭔가 여성잡지의 화장품 광고처럼 나와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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