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그럴 수 있지!"
다들 자주 쓰는 말이 한두 가지 정도 있죠? 문장이나 단어, 감탄사, 외계어 등등. 내가 어떤 말을 자주 쓴다는 사실은 자각하기보다 옆에서 누가 "넌 맨날 그 소리냐"라고 지적해 줄 때야 알게 된다. '아 내가 그랬구나'. 나도 그렇게 깨달은 말이 몇 개있다. '나쁘지 않아'와 '그럴 수 있지'가 대표적이다. 모호하게 결론을 내리는 내 성격에서 비롯된 말들이다. 나는 뭘 물어도 시원스럽게 좋아, 싫어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 영화 재미있어?" "어.. 나쁘지 않아" "곱창 먹으러 갈래?" "곱창 나쁘지 않지" 같은 식이다. 그럼 질문자는 나쁘다는 건지 좋다는 건지 알 수 없어 속이 터져 벌인다.
나를 답답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 생각의 흐름을 설명해 보자면, '나쁘지 않다'는 말을 하기까지는 대략 이런 과정을 거친다.
"저 화장대 어때? 살까?"
"어... (화장대가 하얗고 깔끔한 게 좋긴 한데 때가 탈 수도 있을 거 같고 거울이 좀 작네 더 크면 좋겠다 근데 막 못 쓸 정도로 작진 않으니 상관 없겠지 거울 뒤에 수납장이 있네 거울을 옆으로 밀어서 수납장을 열 수 있음 더 좋겠는데 여닫이라 좀 불편할 거 같긴 하다 쓰다 보면 익숙해 지겠지 근데 디자인이 좀 더 모던하고 감각적인 게 좋은데 아마 그런건 찾기 어렵겠지 또 비싸기도 할 거야 아주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이 가격대에서는) 나쁘지 않아"
쓰다 보니 이걸 설명해 주면 그들은 더 복장 터져 할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 귀찮은 게 아니라 사실 너무 여러 가지를 생각하느라 이렇게 의뭉스럽게 말 한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지'는 여러 모로 유용해서 많이 쓰는 말이다. (상황1) 상사한테 혼났거나, 여자친구와 싸웠거나, 성적을 안 좋게 받은 지인을 위로하는 경우, '너무 걱정하지 마,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상황2) 상대방이 뭔가를 주장할 때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는 뜻에서도 사용한다. 수긍하긴 싫은데 그렇다고 상대방이랑 한 판 뜨고 싶지도 않을 때 유용.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꼼수다.
(상황3) '세상에 나쁜 것은 없다',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다'는 주의라서 옳다, 그르다, 착하다, 나쁘다 같은 말을 쉽게 쓰지 않는다. 많은 상황에서 판단을 미루는데(미루다 미루다 이런 것까지) 그렇다고 마냥 닥치고 있을 순 없으므로 "에.. 그럴 수 있지"라고 한다.
이런 이유들로 사용하던 게 지금은 습관이 되어 아무 때나 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애인이 내게 '그럴 수 있지 금지령'을 내렸다.
"내 친구가 그러는데 이러저러 했다더라"
"으음 그럴 수 있지"
"..."
"...?"
"짜증나"
"뭐가?"
"'그럴 수 있지'라고 하지 마"
"왜?"
"어물쩍 넘어가는 것 같단 말이야. 내 얘기에 관심이 없는 것 같잖아"
'아하, 그럴 수 있지!'라고 답할 뻔하다 잘 삼켰다.
금지령 아래 언어를 잃고 침묵에 잠긴 동안 나 같은 애인과 사귀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오늘 한강 갈까?"
"음 나쁘지 않네~"
"나 오늘 멋져?"
"괜찮네 나쁘지 않아"
"같이 잘래?"
"나쁘지 않아~"
"사랑해"
"그럴 수 있지!"
음 이런 데이트라면 조금 곤란할 것 같긴 하다. 역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교훈을 얻었으니 나쁘지 않군!
+ 전세로그 2019. 03. 22
음식명: 흰 새우 기름국 (어휴 하마터면 감바스가 될 뻔했어!)
음식명: 지옥에서 온 오꼬노미야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