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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글로그

[글로그 03] 미루자

나태로운 삶을 어떻게든 합리화 하려는 옹알이

by 빵떡씨

저에겐 '인생 뭘까' 사전이 있습니다. 가끔 '어 시발 이것은 인생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 해소할 방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공책을 만들어 거기에 제가 생각하는 인생에 대해 적었습니다. 예상하셨다시피 다음 날 읽으면 어떤 내용인지 짐작키 힘든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저 살기 팍팍하였군 하는 고단함만 가늠할 수 있곤 합니다. 그런 중에도 꽤 완성도 있는 문장이 있어 가져와봅니다.



'인생은 미루는 것이다.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하기 싫은 것들을 미루면 결국 꼭 해야 하는 것과 당장 하고 싶은 것만 남는다. 그런 것들로 시간을 보내다 끝내 절대 미룰 수 없는 죽음을 맞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뭔가를 미루거나 귀찮아 하고 있다면 '음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군'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삶에 대한 진중한 고민보다 이 나태로운 삶을 어떻게든 합리화 하려는 옹알이가 돋보인다. 문장을 완성한 후 흡족해 하며 또 뭔가를 미룬 기억이다. 일을 미루면 주로 자책감에 시달지만 그 속에 봄꽃처럼 피어나는 약간의 쾌감이 있다. 일을 절대 더 미룰 수 없는 선까지 미뤄 놓고 덕분에 생긴 공백에 짜릿해 한다. '마감이 여섯 시니까.. 네 시 반쯤에 시작하면 되겠네... 그럼 지금부터 세 시간 동안 뭘 하면 좋을까'. 보통 그 세 시간 동안은 음악 스트리밍을 재생 해 놓고 책을 깔짝깔짝 보거나 지그재그에서 랩스커트를 검색하거나 피어싱을 구경한다. 그러니까 별 일 안 한다. 끝내야 할 일이 있다는 부담감에 어디에도 집중하긴 힘들다. 간간히 일을 미루고 놀고 있다는 생각을 상기하며 짜릿한 감각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일을 미루는 것에 꽤 호의적이다. 뭔가를 많이 미룬다는 건, 그만큼 삶이 유동적이라는 뜻이다. 치욕스런 초등학생 때를 떠올려 보자. 학교 끝나고 방과 후 학습 하고 태권도 가고 미술학원 가고 집에 와 구몬 학습지를 하면 새나라의 어린이가 잠 들어야 할 9시가 되곤 했다. 존나게 헌 나라에 살면서 새나라의 어린이의 의무만 강요받는 모순이었으나 그 시절엔 그런 자각도 없었으므로 그냥 잤다. 그때 우리가 미룰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자유와 유동성이 없는 삶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어른이다. 헌나라의 어른이는 밤을 새도 되고 술을 먹으면서 밤을 새도 되고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술을 먹으면서 밤을 새도 된다. 브라보. 내 뜻대로 좌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만큼 자유롭다. 물론 아침 9시 출근은 잊어선 안 되지만.



나는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도 미루기를 많이 활용했다. 예컨데 스무살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고등학생 때처럼 공부를 인생의 가장 큰 의미로 여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때 '이제 무엇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하나' 고민한 적이 있다(그런 건강한 고민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정말 진중하게 고민 했는지 아니면 그 나이에 걸맞는 고민이 필요해 분위기만 잡은 건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답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이걸 꼭 지금 고민해야 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에 다시 생각해 보자'고 고민을 유예했다. 그러자 정말 말끔히 고민이 사라졌다. 스물다섯까지 별 고민 없이 흥청망청 젊음을 허송했다. 그 후론 골치 아픈 생각이 들면 '다음에 생각하자'고 미뤘다. 그럼 시간이 지나 저절로 해결되기도 하고, 또 지나고 나면 별로 큰 고민이 아닌 것으로 판결 나기도 했다. 아 그래서 스물다섯에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았냐 하면 그 고민은 다시 서른으로 미뤘다. 그냥 오십 살 정도로 거하게 미뤄두는 게 나으려나.



최근엔 서점에서 <미루기의 천재들>이라는 책을 샀다. '일을 미루는 건 이런저런 면에서 천재가 되는 데 도움이 됩니다!'하는 내용을 기대했었다. 그럼 내 미루는 습관을 합리화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뭐 부분적으로는 그런 내용이긴 했다. 책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렇게 일을 미뤘다고 한다. 그는 7개월 후에 완성해 준다던 그림을 25년 만에 완성하기도 했다(좀 심했다). 죽기 직전엔 '아직 못 다한 일이 많은데!'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저자는 다빈치가 공무원처럼 따박따박 작품을 완성했다면 천재처럼 보였겠냐는, 비논리적이지만 왠지 수긍이 되는 코멘트도 덧붙여 놨다. 찰스 다윈은 진화론을 생각해 낸 후 약 20년이 지나서야 발표를 했다. 그 동안 뭘 했냐면 따개비(갑분따) 연구를 했다. 누가 '언제 진화론을 발표할 거냐' 물어봐도 '아직은 때가 아니옵고'라고 답했다. 수많은 따개비들이 명을 달리 하고 나서야 다윈은 미루고 미루던 진화론을 발표했다. 저자는 중요한 일일수록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일을 계속 미루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20년은 좀 심하지 않나.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천재들도 일을 미뤘다는데 뭐'하는 안심도 들지만 '아무튼 뒤지기 전에 뭐 하나 빵 터뜨려야 하는구나'하는 체념이 더 크게 든다.



내가 미루기에 대한 글을 쓰자고 생각한 게 작년 말(올해도 미루다 미루다 계획한 일을 반도 못 했다는 주제로)이었는데 해를 넘겨 3월이 다 가서야 이렇게 쓴다. 미루기에 대한 글쓰기를 미루는 건 자연스러워 보이긴 한다. 나는 글로 쓰고 싶은 소재를 공책에 따로 메모해 둔다. 거기엔 소재만 적어 놓고 쓰지 않아 먼지를 후후 불어 꺼내야 할 만큼 오래된 소재들이 한가득이다. 나도 죽기 전에 '아직 못 다 쓴 글이 많은데!'라고 말하면 다빈치처럼 좀 천재적이어 보일까.



+전세로그 2019.03.31

빨래를 널던 동생이 "이게 그 유행이라는 크롭틴가 뭔가냐"해서 봤더니 니트가 줄어 있었다.

의문의 아동복 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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