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친절한 사람에게 홀딱 넘어갑니다. 이니스프리 매장에서도 매장 언니가(나이와 상관 없이 언니라고 부르게 되는) 사근사근 조곤조곤 말랑말랑하게 얘기해 주면 '헤...'하는 마음이 돼서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삽니다. 호구로운 태도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갑들에게 홀대 받다 간만에 따스한 대우를 받으면 마음이 노곤노곤 녹습니다.
다양한 친절 중에서도 슛을 하는 오른손을 거드는 왼손처럼, 꼭 필요한 만큼의 자연스러운 친절을 좋아한다. 예컨데, 회사에서 집까지 박스를 들고 간 적이 있다. 셰어하우스에 살 때 전세집으로 이사를 가야 해서 이삿짐을 쌀 박스가 필요했다. 회사에 남아 도는 박스가 있기에 들고 나왔다. 하지만 내 몸 하나 낑겨넣기 힘든 퇴근시간의 버스에 내 몸 만한 박스를 들고 탈 수가 없었다. 그래서 3-40분을 걸어 셰어하우스까지 가기로 했다. 나중에 연인과 전화를 하는데 "택시 타지 그랬어"라고 하기에 "아..."하고 깨달았다. 없이 살다 보면 택시가 있다는 것도 까먹는다.
박스를 들고 원남동--혜화동--보문동 코스로 걸었다. 박스는 정말 어떻게 들어도 불편하다. 손 아구가 아프든지 이두근이 아프든지 아무튼 어디 하나는 아프다. 그래서 박스를 옆구리에 꼈다가 양 손에 들었다가 안았다가 하면서 걸었다. 그렇게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는데 <동양서림>이라는 서점이 있었다. 굴림체의 정갈함과 배달의 민족 주아체의 귀염스러움을 간직한 초록 간판에 끌려 들어갔다. 작은 서점에 가면 조용조용 움직이는 사람들과 장사가 되든 말든 개의치 않는 주인에게서 느껴지는 탈세속적 바이브가 있다. 그 느낌이 좋아 가끔 작은 서점에 간다.
동양서림은 베스트셀러와 신간 말고도 서점 주인이 픽한 도서가 따로 진열되어 있다. 주인 분의 취향이 좋으면 진열된 책을 보는 재미도 있다. 그런 생각을 품에 박스를 꼭 끌어 안은 채 하고 있었다. 그때 누가 어깨를 톡톡 쳤다. "박스.. 맡아 드릴까요?" 서점 주인이었다. "아... 네.." 딸의 손을 신랑에게 쥐여주는 아버지처럼 박스를 서점 주인에게 소중히 인계했다. 꼭 필요한 순간 스무스하게 들어온 친절함.. 따스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친절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주인의 따스함에 홀려 책을 두 권이나 사서 나왔다(마케팅이었을까). 그 후로도 혜화동 로터리를 지날 일이 있으면 꼭 동양서림에 들른다.
인간은 대게 모순적이어서 나는 오히려 불친절한 곳을 찾을 때도 있다. 미용실이 그렇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미용실은 아주머니 한 분이 동네 상가에 자그마하게 운영하는 정도였다. 그저 머리나 시원히 감겨주시고 빵실하게 드라이나 해주시면 '친절하다' 평하던 게 다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 미용실들은 서비스에 스탯을 몰빵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일단 미용실에 들어가면 찾으시는 선생님이 있는지, 기다리는 동안 음료는 뭘 드릴지, 코트는 이리 벗어 주시고 하는 일련의 친절 절차를 밟는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순서를 기다리다 보면 내 차례가 된다. 자리에 앉으면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달라붙는다. 집도의 격인 원장 선생님과 조수 격인 인턴이다. 친절도 미소도 모든 것이 과잉해 보이는 와중에 나의 "그냥 다듬어주세요.."라는 주문은 조금 민망하다. 머리를 다듬고 선생님과 인턴님이 양쪽에서 머리를 말려주면 스미마셍이 맥스에 달한다. 제 머리통이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나는 미용실에 있는 내내 조선에서 현대사회로 타임워프한 선비 같이 좀처럼 적응하질 못 한다. 핫한 드라이기 바람만큼 핫한 친절 속에서 '나는 왜 잘 해줘도 지랄일까' 고민하곤 한다.
나는 그저 다듬어진 머리를 원했을 뿐인데 머리를 다듬은 값에 이런저런 친절 비용까지 청구됐는지 졸라 비싸다. 초콜릿 사러 갔는데 가나에 인형 달고 꽃바구니 달고 돌체앤가바나 향수 칙칙 뿌려서 오만사천 원에 파는 느낌. 가격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 여자 커트 비용이 남자 커트 비용보다 비쌀까. "여자 머리가 손이 더 많이 가니까"라고 말한다면 숏커트인 내 머리는 남자들보다 얼마나 더 손이 많이 가는 걸까. 애초에 머리 길이와 노동력은 비례하는 걸까. 이런 생각들과는 별개로 미용실 직원들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누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으랴. 마지막까지 "다녀오세요 고객님~"하며 인사하는 미용실 분들에게 나는 아 예.. 예에... 하며 꾸벅꾸벅하고 미용실을 나선다.
+전세로그 2019. 04. 08
집 근처 카페에 '피치우롱티'라는 생전 초면인 메뉴가 있어서 주문했다. 피치한 향에 우롱한 맑은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