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이라는 단어는 그냥 단어가 아닙니다. '낮'과 '잠'은 그저그런 밍숭맹숭한 단어일지 모르나 이 둘이 만나면 전혀 다른 단어가 됩니다. 이 말에서는 젖과 꿀이 뚝뚝 떨어집니다. 상류층들만 쓰는 보석의 이름 같기도 하죠. 아무나 누릴 수 없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낮잠'은 함부로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낮잠을 누리지 못 하는 뭇 직장인들의 탄식과 오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죠. 비슷한 이유로 금기시 되는 단어로는 '여행', '브런치', '벚꽃놀이'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제 낮잠을 잘 수 있었다. 감기 때문에 반차를 썼기 때문이다. 저번주부터 목이 칼칼하더니 주말에 밤새 콜록거리고 출근을 하니 콧물이 어제 먹은 가락우동처럼 쏟아져 나왔다. 팀장님 옆자리에서 연신 코를 풀고 기침을 해쌓면서 나는 지금 반차각이라는 걸 어필했다. 사실 집에 가야 할 만큼 아프진 않았는데 오후에 딱히 급한 일도 없고 해서 결국 반차를 썼다.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써.
밝은 태양 아래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반차를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낮에 버스를 타고 이어폰을 꼽고 바깥 풍경을 보는 일은 정말 So chill 하다. 창문 살짝 열었다가 공기가 매캐해서 다시 닫았다. 요맹큼의 감성도 잡아 족치는 미세먼지. 집에 가서 넷플릭스도 보고 청소도 좀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집에 도착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에 털썩 앉아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고 러그로 엉금엉금 기어가서(가는 길에 가방도 벗고) 담요 덮고 바로 잤다. 넷플릭스와 청소는 꿈 속으로 아득히 멀어져갔다.
이런저런 꿈을 꿨다. 재채기를 하고 싶은데 'ㅎ에에... 헤에ㅔ..'까지만 나오고 '취!!'는 나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는 꿈.. 과학 실습 시간에 짝궁의 수정체를 잘라 라식 수술을 해주는 꿈(대체 뭘까)... 나는 아프면 이상한 꿈을 더 많이 꾼다. 현실의 고통이 꿈에도 반영되는 걸까. 깨고 나면 땀이 비질비질 나는 게 사경을 해메는 느낌이 뭔지 알게 된다.
3시쯤 잠들어 6시쯤 깼다. 잠들 때만 해도 밝았는데 깨고 나니 방이 어둑했다. 술을 많이 먹은 다음 날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천장의 고풍스런 꽃무니가 눈 앞에서 울렁울렁 춤췄다. 평소 일어나던 아침 7시의 침대 위가 아니어서 뇌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곧 반차를 쓰고 집에 와 잠이 들었다는 걸 상기해냈다. 벌떡 일어나 머리를 감거나 시리얼을 허겁지겁 아가리에 처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오 갓... 맙소사 행복해...' 움찔움찔 담요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많이 자서 다시 잠이 오진 않았다. 어두운 방에서 쥐며느리처럼 몸을 웅크리고 눈을 껌뻑거렸다.
어렸을 땐 긴 낮잠을 자고 나면 바깥 세상과 아득히 멀어진 느낌을 받곤 했다. 아침에 엄마가 복작복작 아침밥을 해주고, 학교에 가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받아쓰기나 리코더 불기 같은 걸 했다는 사실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할머니가 된 미래에서 눈을 뜬 기분이었다. 인류에게서 한참 멀어진 느낌이었으니 처음 느낀 고독 아니었을까. 내게 부모가 있고 동생이 있고 그들과 매일 저녁을 먹고 아침이면 학교에 간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이 조용하고 어두운 방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린 나는 그런 감각이 낯설고 섬뜩해서 괜히 "합! 얍! 얍!"하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이들이 정체 모를 짓을 한다고 너무 나무라지 말자.
지금도 낮잠을 자고 나면 종종 이런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 기분은 잠깐이며 곧 사라진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낮잠 후의 시간이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주로 누군가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그런 날엔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공허함이 왠지 잠깐에 그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간이나 위장 등의 장기가 있어야할 부분에 찬 바람이 메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땐 누구라도 들어와서 나를 안아줬으면 싶다. 그럼 그 사람의 목덜미나 등을 쓰다듬을 때 느껴지는 육체의 감각을 따라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날 그렇게 따스히 안아 줄 사람은 없으므로 감정이 알아서 지나갈 때까지 드러누워 있곤 한다.
+ 전세로그 2019. 04. 12
이 날 저녁 먹은 것들. 미드에서 배우들이 샌드위치 크게 한 입 베어물고 감탄하는 것처럼 연신 '음~~~~~~딜리셔쓰~~' 하며 먹었다. 소세지 유통기한은 3월 16일까지였으나 기막히게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