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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Apr 16. 2019

[글로그 07] 아이디어

뇌가 발길, 아니 뉴런길 닿는 대로 구르게 내비둬야 한다.

나에겐 멍 때리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멍 때릴 때 뇌가 정화되기 때문이다. 평소에 뇌는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놀랍게도 이게 최선이다). 적절한 기획을 생각하거나 영화에 집중하거나 사회 생활을 하거나 인스타그램에 달 위트있는 댓글을 생각한다. 이 순간에도 뇌는 한 편의 글이라는 목표를 위해 빡세게 일하고 있다. 이런 목표지향적인 삶은 인간에게든 뇌에게든 피로하다. 그래서 가끔 멍을 때리며 뇌가 발길, 아니 뉴런길 닿는 대로 구르게 내비둬야 한다. 콧구멍에서 블랙홀로, 뉴턴에서 맥북으로 생각이 길을 잃게 놔둬야 한다. 이 짓은 버스를 타고 퇴근을 할 때나 주문한 맘스터치가 나오길 기다리는 시간에 하기 좋다. 멍을 때리다 보면 천재들이 그러하듯 종종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 중에 괜찮은 아이디어 몇 가지를 가져와봤다.



1. 뽀스터

지난 주말, 러그에 누워서 멍을 때리고 있었다. 누워 있으니 러그에 붙은 뽀시래기들이 유난히 잘 보였다. 뽀시기를 한 점 한 점 떼어서 누운 채로 팔만 뻗어 탁자 위에 올려 놨다. 근데 이 러그라는 것이 뽀시래기의 정글 같아서 떼어도 떼어도 뽀시래기가 계속 나왔다. 뽀시래기를 떼어서 올리고 떼어서 올리고 떼어서 올리는 반복적 단순노동을 하며 계속 멍을 때렸다. 무의식적으로 "뽀실~뽀실~ 뽀실래기~" 같은 노래도 지어 불렀다.



손으로 뽀시래기를 조물거리다가 문득 뽀시래기를 먹는 햄스터 인형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각질을 먹는 닥터피쉬처럼 책상 위 햄스터 인형에게 머리카락이나 먼지나 손톱 때나 그 외 성분을 알 수 없는 뽀시래기를 주면 햄스터 인형이 다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럼 그 귀여운 햄스터 인형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너도나도 바닥의 뽀시래기를 줍지 않을까. 이 햄스터 인형은 진짜 햄스터처럼 저장된 프로세스에 따라 책상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엉덩이를 흔들기도 한다. 귀엽고 동시에 청결한 햄스터 인형을 모두들 책상에 들이고 싶어 할 거다. 훌륭한 사업 아이템이다. 이름은 뽀시래기 먹는 햄스터니까... 뽀스터... 나는 스스로의 기발함에 심취하여 좀 더 드러누워 있었다.



곧 동생이 집에 들어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내 사업 아이템에 대해 말해줬다. 내 브리핑을 들은 동생은 일단 이름이 존나 구리다고 했다. 또 아무리 인형이지만 귀여운 햄스터한테 어떻게 먼지구댕이를 먹이냐고 했다. 과연 너의 말이 옳다 하며 다시 누웠다.



2. 그로큐나

나는 애교가 많다. 그렇다고 질색을 하며 앉은 자리에 토할 필요는 없다. 연인에 국한된 애교이기 때문이다. 봉인된 몬스터와 같으니 안심하자. 아무튼 애교쟁이인 나는 카톡을 할 때도 표준어에 맞게 쓰지 않고, 시적허용처럼 애교적허용으로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게 쓴다. 그 날도 연인인 영이와 카톡을 하고 있었다. 영이가 뭐라뭐라 해서 내가 '아항 그로큐나(=아하 그렇구나)'라고 답장을 했다. 한동안 영이에게 회신이 오지 않아 멍을 때리며 마지막에 한 답장을 곱씹어보았다. '그로큐나.. 그로큐나...' 생각할수록 익숙한 단어였다. 왠지 머리 아플 때 먹는 약 이름 같기도 했다. 약국에 가서 "그로큐나 한 박스 주세요"라고 하면 뭐라도 내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든 생각인데 연인에게 보낸 카톡으로 무언가의 이름을 지으면 수월하지 않을까? 예컨데 '무야징(=먹어야지)'은 베트남식 요리, '아라쭈(=알았어)'는 어린이용 캐러맬 간식, '해듀공(=해주고)'은 바다에 서식하는 포유류의 이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를 더 생각하다 쓸모도 없고 귀찮기도 해서 관둬버렸다.



그래도 의도치 않은 것 치곤 꽤 괜찮은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멍 때리기를 조금 더 단련하면 쓸 만한 아이디어가 나올지 모른다. 굶어 죽기 싫은 무의식과 아무거나 생각하는 뇌가 힘을 합해 주인 몰래 돈 되는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좋겠다.



+ 전세로그 2019. 04. 16

아무 의미 없이 붙여 놓았다. 계란후라이 하나 만드는데 처난장판을 해 놓은 노란 강아지 새끼 이름이 '제이크'다. 나 같아서 효이크라고 써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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