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서 금지된 것들
[反] 환영받지 못한 자의 생존 전략
어릴 적 나의 삶은 생존의 허락을 외부에서 획득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다. 경제 활동을 할 수 없고, 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으며, 나만의 안전한 공간을 가질 수 없던 시절에는 가부장인 아버지와 동거인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며 생존했다. 부친은 시험 성적이 떨어지면 물건을 던지거나 부쉈으며, 모친은 병증 악화에 따라 종종 나를 악당으로 매도했다.
집 밖에서는 한일 혼혈, 즉 식민자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차별과 혐오를 겪으며 정체성의 혼란과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쪽바리, 악의 후손, 죄인이라는 직접적인 언어와 따가운 시선을 맞닥뜨릴 때면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이러한 가정적 혼란과 일본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혐오 분위기 속, 나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감각을 내면화했고 삶의 내적 동기를 찾기 어려웠다.
가정과 사회에서 각기 다른 이유와 방식으로 억압받았으나, 그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주로 하나로 귀결되곤 했다. 그것은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가정에서는 말 잘 듣고 똑똑한 딸을 자처하며 가족에게 닥친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했고, 사회적으로는 한국 토종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뛰어난 인재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처럼 삶의 동기를 외부로부터 구하며 생존을 허락받는 방식은 자기혐오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지속적인 자기학대로 인한 과로로 열아홉 무렵 몸과 마음의 건강을 완전히 잃었으며 스스로 생사의 기로 앞에 세웠다.
스무 살 때 대학 입학을 포기한 것은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성적에 대한 압박으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는, 요구되는 수준의 결괏값을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과호흡을 일으켜 쓰러지곤 했다. 아마 고등학교 졸업 직후 대학에 진학했더라면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부장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르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반항심도 있었다. 아버지는 내 성적에 집착했다. 아버지 역시 일을 하다가 공부를 늦게 시작했는데, 대학 공부에 큰 흥미를 느껴 교수를 꿈꿨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꿈은 어떤 이유에선지 좌절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지병이었던 폐렴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과 대학교수가 되지 못한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그 이야기를 할 때, 아직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듯 흔들리던 아버지의 음성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대학 교수는 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자수성가했던 아버지는 결혼 적령기를 한참 지나 우연한 기회로 한국인 아내를 맞게 된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재산을 잃고 아내의 모국인 한국으로 이민온다. 그리고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두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을 부양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술담배도 할 줄 몰랐고, 가끔 물건은 부쉈지만 사람을 패진 않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붙들고, 정신증을 앓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의 존재를 견디며 헌신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어쩌면 유일한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성적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에는, 한국에서 이민자로 살며 느낀 굴욕과 좌절된 명예를 나의 성적표로 회복하려는 일종의 보상 심리가 작용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대입을 포기한 후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나는 불안정한 형태로나마 경제적 독립을 이뤘다. 그리고 각종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역세권 청년 주택 아파트에 당첨된다. 그렇게 스물세 살에 출가하면서 물리적으로 가족에게서 벗어났으나, 정서적으로 독립되었다고 보긴 어려웠다. 나는 손에 선인장을 쥐고 있듯 가족 부양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놓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삶의 내적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데 원인이 있었다. 죄책감과 책임감의 형태로 원가족에 스스로 묶어놓고 사랑을 갈구하는 격이었다.
가족으로부터 원하는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으며, 나를 사랑해 줄 새로운 가족을 외부에서 찾기 위해 애썼다. 새로운 가족을 찾는 방식으로 채택한 것은 주로 이성과의 연애였다. 그러나 제대로 사랑 받아본 적 없는 여자가 사랑을 찾는 과정은 지난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다섯 번도 넘게 봤지만, 사랑을 갈구하다 상처받고 버려지는 마츠코에게 매번 나를 투영해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아내곤 한다.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거나 데이트 폭력으로 사망하지 않고 만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어찌어찌 생존한다.
몇 번인가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 진정한 사랑 비슷한 것을 발견한 나는 삶에 희망을 품게 되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고독감에서 벗어나 타인과 깊은 연결감을 느낄 때면 죽음에 대한 욕망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이성과의 연애 말고도 마음을 나누며 서로의 곁을 지켜온 소중한 친구가 한 명 있다. 내 생일로부터 보름 뒤에 태어난 그는 성장 배경도, 체구도, 얼굴 생김새도 나와 비슷하다. 그와의 인연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어져 올해로 14 년이 되었다. 서로의 가장 괴로운 시절과 구린 모습마저 공유하며 성장한 그와 나는 언제부턴가 서로의 후천적 가족을 자처하며 삶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서로를 지켰다.
작년 8 월 그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아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 내가 죽으면 몇 푼 안 되는 나의 전 재산을 그에게 모두 위임하겠다고 적었다.
나의 원가족은 이미 오래전 구성원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집단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외부에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정상 가족’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정신질환을 치부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통은 오롯이 개인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된”다고 가르쳤던 아버지, 누구도 만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던 어머니를 통해 고립과 단절을 학습한 나는 관성적으로 혼자 있기를 택하며 정신증을 악화시켰다.
사회적 고립이 자살 사고로 이어지는 패턴을 수없이 반복하며, 나는 인간이 고독사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타인과 연결될 기회를 의도적으로 일상에 배치함으로써 죽음으로 내달리는 욕망을 잠재우곤 한다.
한편,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나를 괴롭히던 각종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꾀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추간판 탈출증, 어머니의 정신증을 물려받고, 그 외에도 각종 신경성 질병을 앓으며 “건강한 삶”에 대한 나의 욕망은 자연스레 부풀었다. 열여덟 살부터 신경외과, 내과, 정신과, 산부인과 등을 전전하던 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을 억제하는 대증치료 방식과 현대의학의 한계를 일찍이 깨닫는다. 의학 분야를 전문가가 독점하고, 진단명과 처방 약을 하나둘 늘려 병원에 의존하도록 하는 거대한 구조에 환멸을 느낀 나는 기능 의학을 비롯한 민간요법 도서 및 자료를 탐독해 내 몸의 주치의가 되기로 한다.
최근 건강진단 결과 모든 항목에서 정상, 그것도 상당히 안정적인 수치를 기록했으며, 심혈관 나이는 약 22 세로 원래 나이보다 4 살 젊게 측정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건강 주권을 되찾기 위한 피나는 노력은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다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