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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제라늄 Jan 08. 2020

맹물에 빨래하듯 살면 좋겠다

세탁기 안에 하얀 곰돌이 한 마리가 들어있는 것처럼 거품이 북적북적했다.


‘아직도야? 다음번에는 더 많이 줄여야겠네.'


세탁기에 넣는 세제에 신경을 쓰게 된 이유는 스테판네 집 세탁기 점검 덕분이었다. 스테판 집에 세탁기를 점검하러 왔던 기사님의 분석에 의하면, 그동안 그 가족이 438번이나 세탁기 세제를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넣었다는 결과가 나왔단다. 어떻게 횟수까지 계산되어 나오는 건지 그 과장된 정확도에 '풉' 하고 웃음이 먼저 나왔다.

 



평소에 나는 세탁기에 시간 예약을 해놓고 출근을 한다. 우리 집은 부엌과 거실 사이가 열려있는 구조인데, 우리가 집에 머무는 저녁 시간에 부엌에서 돌아가는 세탁기의 소음으로 인해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빨래가 끝나 있어서 곧바로 널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우아한 저녁시간을 보장해주는 이 기능을 어찌 애정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주말에 세탁기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커피를 한 잔 타려고 부엌에 들어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빨래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거품이 차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세탁기에 거품 목욕제를 넣었을 리는 만무하니 원인은 하나뿐, 스테판네 세탁기 보고서에 킥킥거릴 상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야말로 516번도 넘게 세제를 과잉투여 해온 거 아냐?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다 빨아 헹궈진 수건의 촉감이 어째서 질척거렸는지, 왜 갑자기 팬티 고무줄 자국을 따라 두드러기가 났었는지를 말이다. 그동안 세제를 입고 살아왔다니! 반신반의하면서 다 빨아진 수건 하나를 집어 수돗물에 적셔 비틀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뽀얀 거품이 나왔다. 뜨끔했다.


세제 거품 안에서 목욕하고 살아온 것 같았다 (Photo by Pixabay)


그날 이후로 세제 양을 줄여나가는 시도를 해왔다. 나름 줄인다고 하는데도 뭐가 그리 미덥지 못한 지 꼭 한 방울을 더 붓곤 한다. 오늘도 예전에 비하면 반절밖에 안 넣었는데도 복슬복슬 곰돌이가 돌고 있었다. 세제가 고농축이라더니, 더 과감하게 줄여야 하나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진흙에 뒹굴며 사는 것도 아니고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애들도 아닌데, 뭘 그렇게 바득바득 깨끗하겠다고 세제를 뒤집어쓰고 살아왔나 싶다. 세탁의 목적이 청결이라면, 살짝 덜 빠진 얼룩과 화학세제 범벅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청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옷장에 쌓인 옷들이 세제 덩어리들로 보이면서부터였을까? 너무 극성스럽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그동안 똑똑한 척, 깨끗한 척, 잘하고 사는 줄 알았더니 완전 허당이었나 보다. 뭘 그리도 열심히 씻어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문득 맹물에 빨래하듯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악스럽게 빨래를 비비듯 얼룩 하나 실수 하나까지 아득바득 씻어내며 지우고 사는 거 말고, 그냥 내 모습 그대로 맑은 물에 휘리릭 헹구어 날 것 냄새나게 살아봐도 좋을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세제라도 자꾸 칠하고 거칠게 빨아대면 옷감도 옷 모양도 상해버리고 만다. 처음의 본질을 지켜낼 수가 없다. 그러니 자꾸 뿌득 뿌득 씻어내는 대신 나만의 향기가 묻어있는 옷을 입고 옅은 얼룩이 남아있는 채로 살아보고 싶다.


내 향기가... 내 삶의 향기가... 다우니보다 더 향긋할지도 모르잖아.


나만의 향기가 궁금하다 (Photo by Pixabay)


세상을 향한 다정한 시선을 씁니다.

- 파리제라늄_최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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