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은 아침 루틴이 있다. 등교하면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선생님과 주먹 인사 나누기, 사칙 연산 문제 10개 풀기. 그리고는 각자 조용히 책을 읽다가 모두 등교하면 내가 책을 읽어준다. 요즘 함께 읽고 있는 책은 '황 반장, 똥 반장, 연애 반장(송언 글, 윤정주 그림, 문학동네)'. 제목부터 아이들이 열광하는 낱말이 두 개나 등장한다, 똥과 연애.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주인공인 책에 '연애'가 등장하는 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본능적이고 솔직하다. 앞서 등장한 똥 이야기도 즐겁게 읽었지만 아이들이 가장 기다린 건 황 반장의 연애 이야기였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나는, 예고편이라며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삽화로 힌트를 주었었는데 하필 거기에 결혼식 장면이 등장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궁금해 못살겠다, 대체 왜 9살이 결혼을 하는 거냐, 쉬는 시간마다 아우성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시간 여행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인물의 삶을 따라 그 시절 내가 경험한 사건과 감정, 함께 했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련함, 아쉬움, 후회와 같은 현재의 감정도 뒤따라온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첫사랑이 나를 찾아왔다.
재호는 무척 잘생긴 아이였다. 공부도 잘했고 글씨도 잘 썼으며 그림도 잘 그리는, 모든 게 완벽한 아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달리기를 전교에서 제일 잘한다는 것이 내겐 최고로 멋있게 느껴졌다. 달리기 할 때 흩날리는 머릿결, 집중하는 진지한 표정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 역전할 때조차 여유 있게 느껴지는 체력. 그런 아이를 한 반에서 매일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고,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 마음은 재호에게 닿아있었다.
그날은 자리를 바꾸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키 순서대로 남학생과 여학생을 각각 한 줄로 세운 후 짝을 지어 주셨는데 키가 비슷했던 재호와 나는 (드디어 혹은 결국) 짝꿍이 되었다. 흡족한 마음을 숨긴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아 있는데 줄 맨 끝의 여자 아이가 눈이 나빠 칠판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선생님은 한 칸 앞으로 당겨 앉아보라 하셨고 그 아이는 한 칸씩 전진하다가 내 자리에 앉아보고는 그제야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절망. 운명의 장난. 이럴 수는 없지. 세상이 어떻게 내게 이래. 나는 재호 옆을 떠나 맨 뒷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반 아이들에게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면 알아서들 마구 내 편을 들어주느라 정신이 없다. 아니, 그 여자애는 거짓말한 거 아니에요? 걔도 재호 좋아했나 보네. 나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뭐 어떻게 돼,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이었어.
때는 우유를 마셔야 했던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진작에 다 마시고 짝꿍과 유쾌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우유갑을 곱게 접어 상자에 넣고 오던 재호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내 책상 위에 뭔가를 쓱 던지듯 주고 가는 게 아닌가.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을 내게 쏠리게 한 그것은 바로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오직 나에게만 주는, 그 외 아무도 받지 못한.
꺅! 재호도 선생님 좋아했나 봐요. 우와 해피엔딩이다. 그래서 사귀었어요?
멋진 글씨체와 직접 그린 귀여운 그림이 가득한 카드에는 내가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길 바라는 재호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 몇 번을 썼다 지웠다 하며 답장에 정성을 담고자 했던 내 뒷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다. 봐 봐요, 인생 10년 차에도 누군가를 아끼고 좋아할 수 있다고요. 제가 그 살아있는 징표예요.
딩동댕동. 수업이 끝났다는 종이 쳤다. 에잇, 오늘도 수다가 길었구나. 아이들이 내게 몰려와 묻는다. 재호는 지금 어디 있어요? 글쎄, 내 마음속 어딘가?!
솔루션스 'Shine on me'
https://youtu.be/cHtKlR2hLTI?si=6lcKpMD3hvqn5iS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