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Nov 26. 2022

거리 조절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는 ‘거리 조절’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불을 쬐는 것’과 같다. 불에 너무 가까이 가면 데이고, 너무 멀어지면 추위에 떨게 된다. 그렇기에 불을 쬘 때는 불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에 데이지도, 추위에 떨지도 않을 적당한 거리 말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사람과 너무 멀어지면 외롭고, 가까워지면 상처를 받기 쉽다. 나의 일생은,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시작은 아마도, 나의 10살 생일파티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 학교에서는 생일날에 모든 급우들을 키즈카페나 패밀리 레스토랑에 초대하여 파티를 여는 것이 유행처럼 여겨졌다. 그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의 부모님) 또한 기꺼이 생일파티를 준비해 주셨다. 파티를 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을 빌리고 노래방 – 나는 노래방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을 예약했다. 생일날이 되자, 급우들이 선물을 들고 찾아왔고, 그렇게 파티는 시작되었다.    


    그 파티에서 느낀 감정은 모순적이게도 외로움이었다.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정작 내가 좋아하는 색상은 무엇인지,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를 고려한 선물은 없었다. 생일 카드에는 대부분 ‘생일 축하한다.’는 짧은 문장과 부모님이 불러주는 대로 쓴 듯한 상투적인 말들이 전부였다. 식사를 마친 이후,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노래방에서 꽤 오랜 시간 박수만 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 생일이지만, 왜인지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온 듯한, 철저하게 타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처음 느꼈던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그리 사회성이 좋은 어린이가 아니었기에, 그 사건 외에도 인간관계에 피로를 느끼는 일들이 꽤 많았다. 어린 시절에는 흔히 그렇듯, 친구들과 참 갖가지 이유로 다투곤 했다. 다른 무리와 어울렸다는 이유로,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먼저 하교했다는 이유로, 생각도 나지 않는 자잘한 이유로, 혹은 이유도 없이.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였고, 오늘의 친구는 내일의 적이었으며, 그렇게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히듯이 달라지는 것이 아이들의 인간관계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허무하고 불안정한 관계를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완전히 놓아버리는 쪽을 택했다.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을 느끼지 않으려, 어느 누구와도 깊은 유대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인간관계란 나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이를 놓아버리는 동시에, 내가 온전히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부에 매달렸다. 성적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 온전히 내 의지의 영역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안정감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을 사람과 멀리 떨어져 보냈다. 정을 주지 않되,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인 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에게 친구란, 학교에서 함께 밥을 먹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로 나의 중학교는 사람이 아닌 성적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에게 손 내밀었던 사람들에게도 많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날은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중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을 계획했기에, 중학교에는 더욱 정을 붙이지 않았다. 별 감흥 없는 졸업이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같은 가사가 유별나다고 느끼며 교실을 나서는 순간, 같은 반 친구가 다가와 편지 한 장을 건네었다.


-     벌써 중학교 졸업이네. 그동안 고맙고 즐거웠어. 나는 00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는데, 너는 다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다고 들었어. 지역은 달라지겠지만 고등학교 가서도 연락하고 지내면 좋겠다.


    함께한 시간이 즐거웠다는 내용. 계속 연락하고 지내자는 마음. 이런 내용들이 담겨있던 장문의 편지였다. 그 정성 어린 편지를 받고도, 나는 문자로 그저 상투적인 답장을 보냈다. 나를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간 마음과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도 모르던 날이었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도, 나에게 손 내밀었던 친구들에게도 꽤 외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면 추위에 익숙해지듯, 외로움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것이 외로움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3년을 다닌 중학교에서, 추억할 친구 한 명 없이 졸업한 것이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를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 견고하게 쌓아왔던 마음의 벽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허무하도록 빠르게 허물어졌다. 햇살 앞에 속절없이 코트를 벗어 들었던 나그네처럼, 밀려드는 다정 속에 기꺼이 마음을 열었다. 이렇게 쉽게 열릴 마음이었을 줄이야. 고등학교에서 나의 삶을 따듯하게 만들어 준 많은 인연을 만났고,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처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기숙학교였다. 익숙한 집을 떠나 기숙사에 적응하는 것은 순탄치 않은 일이었고, 끝내 버티지 못하고 전학이나 자퇴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신입생들의 고민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의 적응을 돕기 위해 짝선배를 지정하여 후배들의 적응을 도왔다. 감사하게도, 나의 짝선배들은 사랑이 넘치는 햇살 같은 사람들이었고, 모난 마음은 넘치는 애정에 쉽게 풀어졌다.


   17살의 봄에는, 처음 마주한 낯선 환경도, 빡빡한 규율도, 오르지 않는 성적도,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그래서 참 많이 울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매번 눈물바람으로 다니는 후배가 귀찮을 만도 했을 텐데, 선배들은 내가 학교에 적응하기까지 매번 편지를 써주고는 했다. – 우리 고등학교에는 친구들끼리 도서관 책상에 쪽지를 붙인 간식을 놓고 가는 귀여운 풍습이 있었다. – 그 속에는, 힘들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너는 분명 잘 해낼 거라는, 너를 만나 다행이라는 다정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지치지도 않고 주어지는 애정 속에서, 외로웠던 마음이 조금씩 충만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단단한 둑에 작은 균열이 생기면, 둑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듯, 한 번 마음이 열리고 나니 그 이후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순탄하게 이어졌다. ‘날이 좋아서, 공부가 하기 싫어서’라는 핑계를 대며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편지를 주고받았고, 쉬는 시간 내내 함께 운동장을 걸었으며, ‘근데 있잖아’로 시작하는 누군가의 고민에 대해 밤을 새워 이야기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열 일을 제치고 달려와 서로의 손을 잡았으며, 각자의 생일이 되면 사감 선생님 몰래 생일 케이크를 자르며 낄낄거리는 날들이었다. 그 예쁜 사람들 속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웠고, 누군가를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시절은,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지나오며, 인연이 닿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주지 못했던 애정들을 꾹꾹 눌러 담아 전하곤 했다. 마음을 전하는 법을 처음 배운 아이처럼,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어 급급한 날들이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좋은 일만 가득할 것만 같았다. 주고 또 줄 다정이 많았던 스무 살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무뎌질 만큼 가까워지는 거리가 서로에게 독이 될 수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너무 가까워졌을 때 상처가 되는 관계도 있음을 몰랐던 시간이었다.


    이를 깨달은 것은, 스물세 살의 여름이었다. 5년이 넘는 시간을 매일같이 본 얼굴이 있었다. 많은 날들을 함께 웃었고, 숱한 어려움을 같이 지나온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졸업 시기와 진로가 달라짐에 따라, 얼굴을 보는 날은 자연히 줄어들었고 빠듯한 시간을 맞추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었다. 관계의 추가 기울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애써 외면했다. ‘우리가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지도 모르고, 기다리고 애정을 주다 보면 더 건강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위태롭게 쌓아 올린 갈등은, 작은 바람에도 쉽게 무너져버린다. 정말 평범한 하루였다. 그는 동아리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밀려드는 일정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긴 하루를 마치고 친구의 공연을 보러 간 날, 무대 뒤에서 만난 그는 나와 함께 간 친구에게 ‘와 줘서 고맙다’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옆에 선 나에게 그가 건넨 말은 ‘넌 당연히 와야지’였다. 그가 뱉은 그 별스럽지 않은 한마디가, 그날따라 기껍지 않게 들렸다.  ‘서로에게 당연하다.’ 어찌 들으면 참으로 로맨틱한 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무책임한 말이기도 하다. 세상에 당연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어. 나는 그에게 너무나 당연한 사람이었다. 당연해질 만큼 익숙해진 관계 속에서, 내가 그를 위해 내는 시간은 더 이상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나에게 상처를 줄 의도가 아니었음을, ‘친한 친구가 공연을 하는데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지’ 정도의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더 아프다는 것을 느낀 날이었다.


    인간관계는 시소와 같다. 서로의 무게가 비슷해야 놀이를 이어갈 수 있는 시소. 어느 한쪽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우면, 시소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향한 마음의 무게가 비슷할 때 관계는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그 무게의 추가 기울어질 때, 관계는 어그러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타인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과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요즘이다. 오랜 시간을 핑계로, 미안함이 무뎌지고 고마움이 당연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곁을 주지 않아 외로운 날도, 너무 많은 마음을 주어 상처받는 날도 겪었다. 이 모든 관계를 지나오며 생각한다. 불에 데지도, 추위에 떨지도 않을 수 있는 적당한 거리는 어디일까. 외롭지도 상처를 받지도 않을 수 있는 관계란 무엇일까. 그 ‘거리 조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했다. 너무 먼 거리도, 아주 가까운 거리도 경험해 보았지만, 무엇도 정답은 아니었다. 인간관계에 정답이란 없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정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러 관계들을 겪어오며 깨달은 것들도 많다. 외로움은 건강하지 못하고,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이제야 비로소 마음 깊이 느낀다. 타인과의 거리를 좁혀 나감에 따라, 분명 어느 날은 기쁘고 또 어느 날은 실망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웃고 울며 살아가고 싶다. 그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상처받을 것을 미리 걱정하며 누군가를 애정하는 마음을 아껴 두지는 않을 것이다. 다 주지 못한 사랑은 후회로 남을 뿐이니까.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를 태우면서까지 누군가를 사랑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더 많이 웃고 울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과의 이상적인 ‘거리 조절’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안고, 나는 오늘도 당신과의 거리에 대해 고민하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