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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Oct 27. 2023

글공장 가동.

어제, 오후부터 하늘이 흐려지더니 이내 컴컴해지기에 '해가 지나보다.' 하고 무심하게 넘겼다. 

그런데 곧 하늘이 울리더니 비가 쏟아졌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해서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싫지는 않았다.

작업실 창가에 붙어서 비 구경을 하는데 우산을 쓰고 걸어오던 청년이 흠칫 놀란다.     

‘이보게 청년, 당신을 본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비를 봤소이다. ’ 하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비가 와서 사방이 어두컴컴한데 긴 머리를 한 허연 여자가 창에 붙어있으니 놀랄 만도 하다. 쏘리.     


집으로 돌아와 씻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딱히 뭘 한 것도 없는데 지독하게 피곤하고 여기저기 아파서 차라리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자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갑자기 창밖이 번쩍 하더니, 쾅! 천둥이 울린다. 그리고 집이 흔들리도록 지축이 울렸다. 

뭐지? 전쟁 났나? 천둥번개치고는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크잖아?

호다닥 일어나 밖을 살폈는데 고요하게 비만 내린다.     

나중에 알았는데 신호조작기가 벼락을 맞았는지 근처 도로의 신호등이 몽땅 고장이 났다고 한다. 참, 별일이 다 있는 밤이다.           




집 공동현관에 물탱크 청소를 한다는 공고문이 붙은 것을 보았는데, 그게 오늘인 줄은 몰랐다. 일찍 일어나겠다는 마음과는 달리 늦잠을 자버렸다. 새벽녘에 기침과 콧물이 쏟아져서 이게 뭐지? 하면서 꽁꽁 싸매고 잤더니 몸은 멀쩡한데, 잠을 너무 많이 잔 모양이다. 비실비실 나와서 물을 마시려는데 정수기가 먹통이다. 목마른데, 물이 없다. 엄마가 따로 받아둔 물이 보였지만, 귀한 물이니 남겨두고 와야 거동이 불편한 동생이 먹을 것 아닌가. 나는 믿는 구석이 있다.  차로 2분 거리의 작업실. 설마 2분을 못 참겠나. 

  

눈곱도 떼지 못하고, 누가 볼세라 거지꼴을 하고 그대로 작업실로 튀어나왔다. 

물부터 한잔 마시고, 냉동실에서 식빵을 꺼내 토스트를 구워 먹고, 천천히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이대로 하루종일 넷플릭스 보면서 놀면 천국이 따로 없겠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다른 길로 가지 않기로(정확히는 다른 길로 가고 싶지 않으니 이 길을 가야겠다는) 마음먹은 이상, 예열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사실 예열이랄 것도 없다. 명백히 딴짓이지.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종일 울어도 봤고, 내가 어쩔 수 없는, 답 없는 일에 웹검색을 하느라 몇 시간씩 인터넷 창을 붙잡고 있던 날도 있었다. 

인터넷 가십에 눈이 팔려 이런저런 커뮤니티 게시판을 누비고 다니며 ‘남걱정’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사실 어젯밤에 하늘에서 번개가 때려 신호등을 고장 내기 전에, 나는 정신이 번쩍 났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서늘해졌다.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냉정해지면 진짜 그렇게 되는구나.  피가 식어 서늘해지는구나. 




보통의 직장인의 통상적인 근무 시간은 하루 8시간이다. 

파트타임이라면 그보다 적을 수도 있고, 교대근무라면 그보다 길 수도 있다.     

나도 그들처럼 하루에 8시간은 글을 쓰려고 한다. 공장 가동이다. 


공장이라는 말이 조금 멋없지만, 글을 쓴다는 일도 공장 가동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우아하게 커피나 홀짝이며 ‘영감’이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연필을 깎는 일은 동화 같은 환상이다. 정의로운 변호사가 법정에서 화려한 언변과 극적인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증인이나 증거로 좌중을 압도해 피고인의 무죄를 끌어내는 것 같은 그런 환상이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일도 현실이다. 그저 하루종일 껌벅이는 커서와 마주 앉아서 생각을 쥐어짜며 타박타박 타이핑을 하는 일. 그 일을 백날이고 천날이고 반복하는 일. 그러다가 연장근무도 하고, 철야도 하고.

하지만 납품을 받아주지 않아 쓰레기통에 처박거나, 애써 만든 물건에 불량이 나서 전량 폐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 다들 그렇게 살 듯 그런 것이다.      


받아줄 거래처가 없다고, 불량 날지도 모른다고 말만 번질번질하며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끝내 몇 년을 공장문을 닫고 게으른 공장장은 딴짓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 팔 물건이 없다.     

 

먼지를 걷고, 껌벅이는 커서 앞에 앉았다.      

손이 굳은 공장장은 나중에 좀 혼나야겠다.    


일단 위잉_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아유, 이지연씨. 나 돈 없는 건 어찌 알고 알아서 채용을 해주겠다는 것인가!!

.... 순간 혹하였으나...ㅎㅎㅎ


그냥, 나는 글공장이나 가열차게 돌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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