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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Nov 03. 2023

외삼촌의 죽음

출근을 하기 위해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외사촌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운전을 하느라 자세히 못 봐서 잠시 멈춰 섰을 때 문자를 확인했다. 이른 아침에 오랜만에 연락 준 사촌의 문자가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ㅠ”


역시 슬픈 소식이었다. 나에게는 어머니의 큰오빠, 큰외삼촌이다. 몇 달 전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입원을 하셨는데, 끝내 회복하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여든이 넘으셔도 법무사로서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셨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 건강하게 오래 사실 줄 알았다. 물론 나도 생업에 쫓긴다는 핑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면도 있다.


그냥 먹먹한 기분이었다. 운전을 하는 동안, 고속도로 주변이 고요해지는 기분이었다. 수십 년간 알고 지내던, 큰외삼촌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원래 눈물이 별로 없지만 그만큼 교류가 많지 않았고,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울적하다거나 슬프다는 것보다는 인생의 허망함이 더 컸다.  순간 오늘 해야 할 회사일이나 복잡한 일상의 번거로운 일들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그 찰나의 순간에는 그랬다.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작아 보인다. 걱정과 근심도 사라진다.


큰외삼촌은 나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명절이나 가끔씩 뵐 때 인사를 드리면, 늘 반갑게 웃어주셨지만 말이다. 목소리가 하이톤에 유난히 맑고, 얼굴도 하얗고, 키도 크시다. 젊었을 때는 인기도 좋았을 것 같다. 우리 집에서 내가 유독 키가 큰 것이 (친가는 170대), 외가의 영향, 특히 큰외삼촌의 영향을 받았다는 어른들의 지론도 있었다.


하지만 꾸역꾸역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나이기에 다시 일상으로 접어든다. 회사에 도착해서 자리에 노트북을 놓고 세팅을 한 후 늘 그렇듯이 에코백에 텀블러를 넣고 나선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인지라 따뜻한 옷을 걸치고 나섰다. 회사 식당에서 먹는 아침밥은 맛있다. 오늘도 계란프라이는 2개, 콩나물 국과 맛있게 먹는다. 좀 전의 먹먹한 기분은 잠시 잊고 내가 주어진 순간에 감사한다. 회사, 식당, 맛있는 밥, 좋은 동료들.


업무를 시작하고 이메일을 읽고 급한 업무를 처리한 후 다른 구성원들과 미팅을 잡았다. 미팅을 하고 나서 점심 식사도 같이 했다. 그 와중에 한 구성원은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참석 못했다. 고속도로 출구에서 나가려고 정차를 하고 있었는데, 뒤에 다른 차가 갑자기 들이박은 것이다.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그 구성원도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잠시 있었던 것이다.


점심을 먹은 식당은 주변의 이름난 칼국수 집이다. 담소를 나누며 칼국수를 먹고 전도 먹었다.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식사 후 새로운 커피숍에 들러서 커피를 픽업해서 나섰다.


다소 뿌연 날씨였다. 그래도 화창한 가을날이다. 구성원들에게는 외삼촌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괜히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는 그렇게 실감이 가지 않는 죽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조차도 외삼촌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으니 오죽하랴. 그나마 80 중반의 나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천수를 누리셨다고 생각하고 싶다.


오후에 일을 마치고 일찍 퇴근했다. 상갓집에 가기 위함이다. 장례식장은 가기에 부담스럽다. 애도하는 마음은 있지만 막상 상주 분들을 대하면 무엇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지 잘 모르고, 그 말이 정말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늘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본다. 어떤 말을 드리는 것이 나을지. 그런데 막상 장례식장에 가면 그 말들이 어색해서 입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냥 손을 잡고 눈빛으로 위로를 할 수밖에 없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침묵 속에 있었다. 날씨가 조금 더워서 창문을 열었다. 교통 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올림픽 대로에서 2차선을 따라서 천천히 운전을 했다. 여전히 나는 침묵했다. 라디오나 음악도 듣지 않았다. 큰외삼촌과 추억을 더듬으려고 했다.  외할아버지 성격을 닮아서인지, 적어도 내게는 과묵한 분이셨다. 가끔 환한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아버지와는 동갑이어서 같이 술을 즐기시고, 많은 대화를 나누셨던 것 같다. 큰외삼촌은 아버지를 좋아하셨다. 오히려 형제지간인 어머니와는 약간의 껄끄러움이 있었지만 말이다.


장례식장은 12년 전에 외할머니를 모신 같은 장소였다. 외할머니가 떠나가셨을 때, 발인을 마치고 외가 근처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한 기억이 난다. 그때 어머니는 과음을 하셨고, 그동안 맺혔던 한과 슬픔을 푸셨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안타까운 마음, 장녀로서 장남만큼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설움이 모두 겹쳤기 때문이리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내가 고등학생 때였고, 그때 하교한 후에 혼자 조그만 방에서 오열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역시 엄한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사랑이 함께 한 애증 때문에 더 그러셨던 것 같다. 예전 드라마나 가정을 보면 그랬다. 장남을 귀하게 여기고, 나머지 형제들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장남이 제사를 지내고, 집안의 대들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장남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면서, 형제들을 잘 보듬어주면 그나마 화목하게 잘 지냈을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에는, 집안에 갈등이 생긴다.


외사촌 간에는 친하게 지냈다. 사촌 형이 우리 형과 동갑이고, 사촌 동생도 나이차가 많지 않아서 곧잘 어울렸다. 사촌 누나들도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다. 물론 공통분모가 없다 보니 오랫동안 교류를 못했다. 그래도 늘 마음은 편하다. 오랜만에 외가 친척들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었다. ‘죽음’은 한 사람의 인생의 끝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래서 죽음이란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작은 외삼촌들, 어머니, 이모는 담담한 모습이었고, 둘째 외삼촌은 문상객을 맞이하느라 바쁘셨다. 큰 외숙모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담담하셨던 것 같다. 가족들 간에 담소를 나누고, 돌아가신 분을 추억했다.


결국 우리는 언젠가 떠나기 마련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장례식장을 다녀오면 늘 그런 화두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삶의 소중함도 느낀 채.


오늘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큰외삼촌을 기억하고 고인을 기리기 위함이다.


큰외삼촌, 부디 푹 쉬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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