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28

초기신라상황 2와 '김알지'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28

ㅡ 초기신라상황 2와 '김알지' ㅡ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된 나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 전 57년 '박혁거세'가 ‘사로국’을 세운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건국 이후 수 세기 동안 왕권과 국가 체제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초기에는 ‘왕’이라는 호칭조차 사용하지 않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과 같은 다양한 칭호를 사용했다.


이 중 ‘왕’이라는 호칭은 6세기 '지증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했다. 국호 ‘신라’도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신라의 왕위계보 또한 독특하다. 초대 박혁거세로부터 시작된 '박씨 왕조'는 이후 '석씨'와 '김씨' 가문과 교대로 왕위를 이어갔다.


김씨는 '김알지'라는 인물로부터 왕족계보가 시작되지만, 김알지는 왕이 되지 않았다. 김알지는 후에 상징적 존재로 추앙되며 신라김씨 왕실 시조가 되었고, 김알지의 직계후손인 '미추이사금'이 13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김씨왕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후 17대 '내물왕'부터 신라가 멸망할 때 까지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된다.


'박씨'와 '석씨'는 이후 왕비족으로 남으며 왕위 계승에서 점차 배제 되었다.


그럼에도 초기에 세 성씨가 왕위 를 돌아가며 계승했다는 점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 이다.


이는 당시 신라가 부족연맹체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특정 성씨가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여러 귀족 가문이 협력과 균형 속에서 정권을 공유했던 것이다.


또한, 신라에 존재했던 ‘화백회의’

라는 정치 제도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귀족 합의체인 화백회의는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했으며, 왕위계승을 비롯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는 피 흘리는 권력투쟁 없이도 왕위가 비교적 평화롭게 교체될 수 있었던 배경 되었다.


김알지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설화로 그치지 않는다.


신라 후대 왕족이 자신들 조상을 '흉노족' 후예로 인식했을 가능성 보여주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대표적 예로 신라 '문무왕릉비' 에는 신라 선조가 ‘투후(屠侯)’,

즉 흉노 귀족출신임을 암시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또 1954년 중국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는 신라 조상이 한나라 '무제' 시기 투항한 흉노왕자, ‘김일제’로 언급되어 있다.


이는 곧 '김알지'가 흉노왕족 후손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주장 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이러한 연관성은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나 학술 담론에서 흥미롭게 제기되며, 때로는 지역 을 폄하하는 의도로 왜곡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자면, 당시 중국 한민족 역시 다양한 북방계 민족들과 융합 속에서 형성된 복합적 정체성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독일의 ZAF 방송에서 방영된 한 다큐멘터리에서도, 신라 토기에 나타난 말 위에 솥을 싣고 이동하는 모습이 훈족(흉노)의 문화와 유사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물론 지리적으로 신라인이 몽골 초원과 유럽까지 진출했다기 보다는, 흉노족 일부가 한반도 남부까지 이주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중국 측 기록은 이를 두고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고 표현했다. 이는 고조선과 흉노가 실제 동맹관계에 있었거나, 최소한 한나라가 두 세력을 잠재적 연합군으로 간주 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고조선과 흉노, 신라와 연결성은 고대 동아시아 정치 복잡한 민족관계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고대사는 결코 단일혈통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 건국설화 에서도 보이듯, 북방 유목민계 집단들이 남하하여 토착세력과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나라를 세웠다.


특히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는 오늘날 한반도보다 만주지역에

그 중심을 두고 있었으며, 이들 국가 구성원은 <말갈, 돌궐, 여진, 거란> 등과 유사한 계통 민족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이란 개념은 혈통만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문화, 공동체 의식이 함께 형성 되고 공유될 때,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혈통중심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주장 하기보다는, 융합 속에 형성된 단일한 문화적 공동체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신라의 진정한 고대국가 체계는 4세기 17대 '내물마립간' (356~ 402) 시기 들어서야 비로소 성립 되기 시작한다.


내물왕은 최초로 김씨 왕위계승을 확립하고, ‘이사금’ 대신 ‘마립간’ 이라는 군주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왕권 권위를 강화했다. 이 시기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왜(일본)과 백제침략에 공동대응 했으며, 그 일환으로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400년경 신라를 도운 기록도 존재한다.


내물왕 치세는 신라가 부족연맹체 넘어서 본격적인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해 가는 전환점이었다.


이후 '지증왕' 시기에 이르러 국호 ‘신라’와 ‘왕’ 호칭이 정식화되고, '법흥왕'과 '진흥왕' 시기에는 삼국 세력 균형 속에서 신라가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일부 중국과 일본학계에서는 삼국 실제 건국시기를 4~5세기로 늦추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이는 고대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해석 이다.


신라를 비롯한 삼국은 허허벌판 에서 부족 단위로 시작된 국가들 이며, 로마가 기원전 6세기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해 수 세기 후 제국으로 성장한 것처럼, 건국 초기 미약함이 곧 건국시기 자체 를 늦추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신라는 초기 수 세기 동안 성씨별 교체 왕위 계승과 느린 중앙집권화 과정을 거쳤지만, 이는 신라만의 독특한 정치문화와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발전 경로였다.


신라 초기사는 단순히 박혁거세의 건국 이야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복잡하게 얽힌 성씨 간 권력 교체, 북방 유목민족과 기원적 연결성, 부족연맹체에서 중앙집권국가로의 진화 과정 까지…


그 속에는 고대 한국사 다면성과 역동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어서 <신라초기 왕들 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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