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전성기 1- 전성기 직전, 산상왕부터 미천왕까지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31
ㅡ 고구려 전성기 1 ㅡ
(전성기 직전, 산상왕부터 미천왕까지)
고구려 최전성기는 4~5세기, 제17대 '소수림왕' 제18대 '광개토대왕', 제19대 '장수왕'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잘 알지 못한 많은 왕들과 그들 노력이 존재 했다.
이번 회차에서는 고구려 전성기 기틀을 다진 제 10대 '산상왕'부터 제16대 '미천왕'까지 왕들을 중심 으로, 그들 주요업적과 역사적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제10대 산상왕>(재위: 197년 ~ 227년)
'고국천왕'이 사망한 후, 왕위를 둘러싼 형제 간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고국천왕의 왕비였던 '우씨왕후' 지지를 받아 '산상왕'이 왕위에 오르며 정국은 안정되었다. 고구려 형사취수제에 따라, 산상왕은 형수인 우씨왕후 와 재혼해 다시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산상왕은 귀족세력과 연합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중앙 귀족세력을 중시한 귀족중심 정치 체계를 구축했다.
한나라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외적 방어에도 주력했다.
하지만 백성보다는 귀족중심 정치 를 펼쳤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제11대 동천왕> (재위: 227년 ~ 248년)
동천왕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중국 세력과 충돌이 시작되었다.
244년,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위'나라 장군 '관구검'의 침입으로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며 왕이 피난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재건에 힘쓰며, 위나라의 공격을 격퇴했다.
'서안평' 공격 시도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며 고구려 위상을 회복하려 했다.
<제12대 중천왕> (재위: 248년 ~ 270년)
즉위 당시 국내정치가 어수선 했으나, 국정안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왕권은 점차 약화, 대신 귀족세력 이 강화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대외전쟁이나 원정은 없었고, 국내정치 정비에 집중한 시기 였다.
<제13대 서천왕> (재위: 270년 ~ 292년)
귀족세력 통제와 왕권강화를 시도 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는 크지 않았다.
전쟁이나 외교적 업적 등 특별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제14대 봉상왕> (재위: 292년 ~ 300년)
전제적 폭정으로 유명하며, 지나친 왕권집중이 귀족과 백성의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300년, 미천왕 아버지 '을불' 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로 인해 폐위되며 왕위에서 물러난다.
이로 인해 왕위계승이 혼란에 빠지고, 고구려 정치 또한 불안정 해졌다. 쿠데타로 미천왕이 즉위한다.
<제15대 미천왕> (을불, 재위: 300년 ~ 331년)
고구려의 중흥을 이끈 인물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통치기간은 고구려가 강력한 국가 로 성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천왕의 주요업적을 자세히 살펴 보자.
1. 서안평 점령 (311년)
서안평은 요동지역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로, 이를 점령함 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지역 장악에 성공했다. 이는 고구려영토 확장 과 경제·군사력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2. 중국세력 축출
313년 낙랑군, 314년 대방군을 공격하여 완전히 축출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 에서 중국세력을 몰아내고 독자적 지배권을 확립했다.
3. 내정강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백성 안정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정복을 통해 확보한 자원과 영토를 바탕으로 경제기반을 확립하고 국가안정을 도모했다.
4. 외교·대외 관계
'서진'에서 '동진'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외교·군사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국제적 입지 를 강화했다.
미천왕은 이처럼 대외정복과 내정 안정 모두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제16대 고국원왕> (재위: 331년 ~ 371년)
미천왕 업적은 그의 아들인 '고국원왕' 시대에 들어서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고국원왕 초기에는 미천왕이 점령한 요동지역을 방어하며 산성과 국내성 증축 등 수비 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중국 '전연'(前燕)의 군주 '모용황'이 발흥하며 고구려를 침략, 수도 '국내성'이 함락된다.
수도가 파괴되어 '동황성'으로 천도한다.
왕릉도굴, 왕후 주씨와 왕비 포함 5만 명 포로로 끌려갔다.
고구려는 멸망위기까지 갔으나
'전연'은 고구려를 직접 통치하기 보다는 신하국으로 전락시켜, 재기불능 상태로만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은 고구려에게 있어 사상최대 국난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고국원왕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같은 시기, 백제 '근초고왕'이 고대 백제 전성기를 맞이해 한반도 중부로 진출을 노렸다.
고구려는 백제 침략을 받았고,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 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이 사건은 고대 한국사에서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우리들 학창시절 일부 역사교사는 "고국원왕은 근초고왕에게 '원망' 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고국원왕' 이라 했다"는 식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原)’ 자는 ‘원망할 원’ 이 아닌, 단순히 묻힌 지역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구려의 초기 왕명 대부분은 묻힌 지역명을 따온 것이다. 고국원왕도 ‘고국원’ 지역에 묻혀서 그렇게 불린 것이다.
'소수림왕'도 '소수림'이란 지역에 묻혀서 불리게 된 것이다.
<고국원왕 이후 고구려의 반격>
이처럼 고국원왕 시절 고구려는 최악의 멸망 위기 직전까지 겪었지만, 고국원왕 두 아들 '소수리왕'과 '고국영왕' 시기에 나라를 재정비하며 다시 일어 선다.
그리고 고국원왕 손자 '광개토대왕', 증손자 '장수왕' 시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는 '전연'과 '백제'에 대한 복수를 제대로 완수하고,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다음 편에서는 고구려 전성기 시작을 알린 소수림왕과 고국영왕에 대해 정리하겠습니다.
초롱박철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