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 깃발이 휘날릴 때
<조선의 아이돌>
제1화 – 깃발이 휘날릴 때
경복궁 동쪽, 훈련원 앞 너른 마당은 새벽의 정적을 일찌감치 밀어내고 있었다.
해는 아직 산등성이 너머에 머물고 있었지만, 이미 마당엔 검은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졌다.
수십 명의 응시자들이 푸른 숨을 토하며 도열했고, 흙먼지 위로 그들의 이마엔 이슬보다 무거운 각오가 맺혔다. 군졸들이 창을 짚고 질서를 지키는 사이 심사관들은 높다란 평상 위에 앉아 시험의 서막을 조율하고 있었다.
장검과 활, 편전, 격구봉—병장기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광경은 그 자체로 전장의 사전 풍경이었다.
말들이 숨을 고르고 사람들은 눈빛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시험장이 곧 검무의 무대였다.
가을 하늘은 높고 무심히도 맑았다.
응시자들 틈엔 어린 아들이 응원 온 노모의 손을 잡고 있었고, 갓 상경한 청년은 무릎 위에 손을 포개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한 인간의 사연들이 숨결처럼 마당 위를 떠돌았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머리 위 높이 걸린 붉은 비단이 일순 휘날리더니 그 중심의 먹글씨가 날카롭게 드러났다.
ㅡ 武科 ㅡ
두 글자. 그러나 그 울림은 크고 깊었다.
장수의 이름이 허락되는 무대 그리고 그 무대에서 살아남을 자를 가리는 검은 시선.
“응시자 구 번, 유자광!”
도열한 응시자들 사이로 가느다란 소란이 번졌다.
유자광. 남원 유 씨 가문의 얼자. 기생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일찍이 경계선 바깥에 세워 두었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벼루보다 무거운 검을 들었다.
문과는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허락되지 않은 길을 포기하자 그는 택했다. 베는 길을.
유자광은 하얀 도포 차림으로 말에 올랐다. 아무 장식도 없고 검은 띠 하나뿐이었지만, 자세는 흐트러짐 없었다.
무예는 몸으로 기억하는 문장이라면 그의 몸은 오랜 수련 끝에 완성된 문장이었다.
“준비 완료.”
숨을 들이쉰다. 깊고 조용하게.
말 앞, 수십 걸음 너머의 표적이 보인다. 단 한 번. 창을 내리꽂아 중심을 꿰뚫는 것. 단순한 시험 이자, 생의 상징 같았다.
“기창, 실시!”
말이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바람이 뒤엉켜 망토를 들추고 창끝이 햇살을 품어 찰나에 번뜩였다.
"퍽!"
정확히 중심.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심사관이 손을 높이 들며 외쳤다.
“정중앙 명중!”
짧은 함성이 일었고 이어지는 수군거림이 시험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정확하다.”
“이게… 초시 실력이라고?”
유자광은 말에서 내렸다. 손끝에도, 발끝에도 힘이 과하지 않았다.
유자광이 혼잣말처럼 뱉었다.
"이 정도면 시험 볼 자격은 증명한 것이겠지.”
그 순간, 다음 이름이 불렸다.
“응시번호 십 번, 남이!”
마당의 공기가 다시 바뀌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기세 하나로 풍경을 바꾸는 존재, 남이가 등장했다.
남이.
푸른 무복, 묶은 머리칼, 검은 띠. 그 뒤를 따르는 하인들 모습이 오히려 그의 담담함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남이는 외척이었다. 왕실의 피가 흐르는 자. 그러나 그를 입에 올릴 때 먼저 언급된 것은 언제나 ‘무예’였다.
남이는 스스로를 증명하러 왔다.
왕가의 피보다 자신의 팔과 검을 믿었다.
“말에 오르겠다.”
단호한 목소리. 말이 한 번 가볍게 울었다. 남이 또한 창을 들고 달렸다.
"퍽!"
명중은 했으나, 중심에서 살짝 벗어났다. 심사관 목소리는 예리했다.
“명중… 정중앙은 아님.”
순간, 남이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관중들 사이로 낮은 소리가 흘렀다.
“그래도 능한 솜씨지.”
“하지만… 유자광보다 반 발 밀렸군.”
남이는 천천히 유자광을 바라보았다. 유자광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있었다. 자광은 고개를 숙이며 남이에게 예를 표했다. 그저 의례처럼.
남이는 피식 웃었다.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위에 서 있군.”
그 웃음 너머로 스친 눈빛은 질투와 경계의 칼끝이었다.
이윽고 격구(擊毬) 시험이 시작되었다.
공을 치고 골문에 넣는 단순한 경기 같았지만, 말과의 호흡, 타구의 정확도, 균형감각을 보는 시험이었다.
“구 번, 십 번. 순차로 진행하라!”
유자광이 먼저 나섰다.
첫 번째, 정확히 골문.
두 번째도 흐트러짐 없이 통과.
그의 타구는 검이 아닌 붓끝 같았다. 단정하고도 유려했다.
남이가 말을 몰았다.
첫 번째, 성공.
두 번째는 조금 강했다. 공이 틀어졌다. 말이 순간 휘청거렸다.
관중들 사이에서 익숙한 속삭임.
“저건… 말이 아니라, 사람이 흔들렸군.”
남이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이런 데서 실수를 하다니. 이럴 수가.”
무예로는 조선 제 일이라고 자부하던 남이었다.
유자광은 조용히 말에서 내려와 한편으로 물러났다.
남이의 시선이 또다시 유자광을 향했다.
이번엔 유자광이 시선을 받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눈을 감았다. 무관의 침묵. 감정은 칼 안에, 말은 칼집 안에.
남이는 웃지 않았다.
그저 중얼거렸다.
“가면 갈수록, 신경 쓰이는데…”
복시 시험. 편전과 백 병을 아우르는 실전.
검이 맞닿는 순간, 단지 무예가 아닌 기개와 속내가 드러나는 법.
사람들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이 시험의 진짜 무대는 남이와 유자광, 두 사람 사이에 있다는 것을.
유자광과 남이.
검을 쥔 두 청춘.
역사의 물줄기 하나가, 그들 발밑에서 조용히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