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검이 처음 말을 할 때
제2화 – 검이 처음 말을 할 때
날은 밝았으나 가을 끝자락의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서울 외곽, 훈련원 별시 시험장.
초시를 통과한 무사들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이곳은 단지 기량을 겨루는 장소가 아니었다.
여기선 조선 칼날이 검증되었고, 또한 조선 칼집이 선택되었다.
깃발이 다시 한번 높이 치솟았다.
흰 바탕 위 검은 글씨로 단정히 쓰인 한 자.
‘射’ — 사.
활쏘기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십보, 이십보, 삼십보 거리의 과녁에 각각 세 발. 조준력은 물론이고 손끝 감각,
그리고 마지막 화살이 떠난 후 흔들림까지도 모두가 점수가 되었다.
“응시번호 구 번, 유자광!”
가늘고 힘찬 음성이 장내를 가로질렀다.
유자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평범한 목재 활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화려함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손끝에는 오랜 벗을 쥔 듯한 익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퉁"
"십보 거리, 정중앙"
"퉁"
"이십보, 중심 바로 옆"
"퉁"
"삼십보, 중심을 꿰뚫었다"
시험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평정심이 탁월하군… 손 떨림 하나 없어.”
유자광은 말이 없었다.
그는 다만 활을 내려놓고, 조용히 숨을 정리했다. 그의 눈빛은 잔잔했고 그 고요는 보는 이에게 조차 긴장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키가 십 척 가까운 거구. 검푸른 도포를 입은 채 팔짱을 낀 모습은 위엄으로 가득했다.
병조참판 허종, 조정 훈구파의 실세였으며 한명회 그늘 아래에서 권력을 실마리처럼 당기는 자였다.
그가 중얼였다.
“얼자라… 저 실력이라면 장원감이지. 하나… 아직은 시기상조이지”
“응시번호 십 번, 남이!”
이번엔 붉은 매듭이 달린 정교한 활이 시험장 중앙에 나타났다.
남이는 조선 왕실의 외척, 명문가 출신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그 자체로 평가하지 않았다.
언제나, ‘치고는’이라는 말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왕실 외척치고는, 꽤 잘하네."
"그 출신 치고는, 제법이지."
남이는 그 말을 싫어했다.
어릴 적부터 익숙해진 그 말이, 이제는 활을 쏘는 순간에도 귓가에 맴돌았다.
"퍽"
"십보 거리, 중심"
"퍽"
"이십보, 중심 바로 옆"
"퍽"
"삼십보, 중심에서 한 치 벗어난 외곽"
관중석에 감탄이 터졌다.
“역시 왕실 혈통이야. 기품이 있어.”
“그래도 유자광이 조금 더 낫지 않았나?”
남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유자광을 향했다.
유자광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탄도, 비웃음도, 심지어 의식 조차 하지 않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저, 한 무인이 다른 무인을 바라보는 담담한 눈빛. 그 평온이 남이 마음을 묘하게 뒤흔들었다.
이어진 시험은 백병전 시연이었다.
장검, 단도, 창 중 하나를 택하여 일대일로 겨루는 방식이었다.
검이 이제 말문을 여는 시간이다.
“구 번 유자광, 십 번 남이! 맞상대 결정!”
장내가 술렁였다.
초시부터 이어져온 두 사람의 흐름이 마침내 부딪히는 순간.
남이는 정통 장검을, 유자광은 쌍도를 들었다.
그들의 걸음은 가볍고 단정했다.
기합도 없었다. 움직임조차 없었다.
오직, 단 한 발자국의 거리.
그 사이에 피어나는 숨소리 하나로 모든 것이 교환되었다.
"슥!"
먼저 움직인 것은 남이었다.
그의 검은 바람을 가르며 유자광 어깨를 향해 내리그었다.
단칼에 끝낼 의지로, 망설임 없는 일격.
하지만 유자광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개의 도가, 마치 하나 생물처럼 움직였다.
"챙! 챙! 휘익!"
세 번의 격돌.
맑고도 묵직한 쇳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도는 막지 않았다. 예측했고, 감지했고, 받아냈다.
남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찰나—
유자광 왼쪽 도가 날렵하게 옷깃 아래를 스치며 지나간다.
"쓱—"
남이의 도복 깃이 조용히 흩날렸다.
깨끗하게, 조용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멈추시오!”
심사관의 외침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거두었다.
남이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고,
유자광은 짧게 예를 올린 뒤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심사관석 뒤편, 허종이 두루마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자광… 실로 뛰어난 자야. 하나…”
그 옆, 내관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께서도 남이를 눈여겨보신다 하옵니다.”
허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번 무과는 검을 겨루는 잔치가 아니다. 이건 선택의 문제야. 누가 조선의 칼이 되느냐… 그리고, 누가 권력의 칼집이 되느냐? 그 싸움이지.”
그의 말 끝에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검은 말을 멈췄지만,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