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소설 - 조선의 아이돌 3

제3화: 검은 왕 앞에 엎드린다

by 초롱초롱 박철홍

제3화: 검은 왕 앞에 엎드린다


“전하 납시오—!”


훈련도감의 전시(殿試) 장.

무과의 마지막 관문, 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이 시작되었다.


장내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는다.

붉은 곤룡포를 입은 조선의 왕이 세자와 대신들 사이로 천천히 들어선다.

왕의 눈은 냉정했고 시선은 날카롭게 수험생을 훑었다.


결정을 향한 고민이 서려 있었다.


“짐이 오늘, 칼을 뽑는다.”


말은 짧았고 무게는 컸다.


시연 1: 혼란한 전장을 돌파하라


가상의 전장을 돌파해 장수를 구출하는 실전형 시연.

응시자는 다섯 명의 무장 병사를 상대하며 제한 시간 안에 목표지점까지 도달해야 했다.

무예뿐 아니라 판단력, 응용력, 지휘력까지 평가하는 종합 시험.


“응시번호 구 번, 유자광!”


유자광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전장으로 들어섰다.

창과 칼, 함정이 엉킨 공간 속, 그는 검을 조용히 뽑아 들었다.


첫 번째 병사가 돌진해 온다.


"촥!"


칼날이 교차하자 유자광의 쌍도는 마치 춤을 추듯 적을 제압한다. 둘, 셋. 날렵한 움직임으로 적을 베고 넘어뜨린다.

그러나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동시에 들이닥치자 그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시간은 조금 더 걸렸다.


“목표 지점 도달!”


심사관의 외침.

대신들 사이에 속삭임이 오간다.


“무예는 뛰어나나 전략 운용이 다소 직선적이군.”


“기지를 쓰기보단 정면 돌파라…”


병조참판 허종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은 전장보다 검에 집중된 무인일 뿐.”


“응시번호 십 번, 남이!”


남이는 말없이 검을 들었다.

표정엔 흔들림이 없고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다.


첫 병사, 단 한 합 만에 무장을 해제. 둘과 셋은 지형을 이용해 접근조차 막았다. 넷째는 퇴로를 끊고 무력화, 다섯째에겐 검 한 자루로 단칼에 창을 쳐냈다.


그리고, 조용히 목표 지점 도달.


관중이 숨을 삼켰다.

그의 검엔 화려함이 없었지만 지나간 자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검을 거두는 순간 쓰러진 병사 하나가 아직 엎드려 있었다.

남이는 멈춰 섰다. 그리고, 조용히 그 병사를 일으켜 세운다.


임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남이가… 쓸 만하구나.”


그날 밤, 조정


전시 결과를 두고 격론이 이어졌다.


왕은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남이는 실전 감각이 탁월하고… 무엇보다 의협심이 있다.”


하지만 훈구파, 특히 병조참판 허종은 유자광을 밀었다.


“남이는 왕실 외척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선 이미 ‘장군’ 소리를 듣습니다. 위험한 인물입니다.”


“반면 유자광은 얼자출신이지만 문무겸비. 민심보다 전하의 뜻에 충직할 인물이지요.”


왕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침묵이 길게 흘렀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 백성이 칭송하는 칼을 묶어 두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튿날, 무과 전시 결과 발표


장원(壯元): 남이


차석(次席): 유자광


병조참판 특별상: 유자광


장내가 술렁였다.

남이는 무릎을 꿇고 장원패를 받는다. 임금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짐이 널 믿는다. 칼을 벼려라.

조선의 적은 국경 밖에도 있고… 궁 안에도 있다.”


남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자광의 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

당연히 받을 줄 알았던 자리.

그러나 또 한 번, 자신의 ‘얼자’라는 출신 앞에 무너졌음을 느꼈다.


남이의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유자광의 가슴엔 씁쓸한 고요가 번져갔다.


달빛 아래, 두 사람


그날 밤. 남이는 유자광을 불러냈다.


정적의 밤, 달빛은 두 사람을 조용히 감쌌다.


남이는 말없이 장원패를 꺼내 유자광 앞에 내려놓았다.

미련과 결연함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이 장원 패는… 본디 그대가 받을 자격이 있었소. 그러나 걱정 마시오. 진정한 장수란, 시험 하나로 그릇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니까.”


유자광은 말이 없었다.

남이의 말은 위로였지만, 쉽게 삼켜지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남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와 겨루고 졌다고 느꼈소.

나는 내 실력에 누구보다 자부심이 있었지만…

그날, 내가 깨달은 건 그대의 검뿐 아니라 마음이오.”


유자광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남이는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맡겨질 일이 많을 것이오. 조선의 혼을 지킬 사람… 나는, 그대가 필요하오. 내 곁에 서주겠소?”


유자광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엔 어릴 적 무시받던 기억, 수없이 베인 수련의 상처,

그리고 오늘의 패배가 겹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남이의 진심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 미천한 얼자, 공께서 품어 준다면… 장군의 그림자라도 되어 따르겠습니다.”


달빛이 두 사람의 손 위에 내렸다.

말보다 강한 맹세가,

그 조용한 밤에 선연히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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