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소설-조선의 아이돌 4

제4화 – 맹세 아래 붉은 술을 붓다

by 초롱초롱 박철홍

제4화 – 맹세 아래 붉은 술을 붓다


늦가을, 조정엔 아직 찬 바람이 감돌았다. 무과 전시 장원에 오른 남이를 위한 비공식 축하연이 경복궁 별전, 의경세자의 개인 공간에서 열렸다.


의경세자는 왕의 맏아들로서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이의 무예뿐 아니라 곧은 성품과 백성 사이의 명망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자리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귀성군 이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아들이자, 왕위 서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왕실 근친 이었다. 의경세자와는 사촌 사이였고, 남이와는 또래의 벗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궁 안의 소연(小宴)>


잔잔한 거문고 소리가 배경을 채웠다. 술상엔 다진 고기와 꿰찜이 놓였고 따뜻한 약주가 따라졌다.


“남이, 장원이라더니 얼굴이 더 늠름해졌구나.”


의경세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과찬이옵니다, 저하. 다 조상 덕에 좋은 팔자를 타고났을 뿐입니다.”


“허튼소리 말게. 실력이야. 자네 칼을 본 자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더군. 나도 궁녀 틈 속에서 몰래 구경했지. 궁녀들 숨소리까지 거칠어지더군, 하하.”


귀성군 이준도 잔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장수는 혼자 서는 법이 아니지. 전장에선 오른팔, 왼팔이 있어야 하네.”


이 말에 남이는 잠시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 말씀… 옳으십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한 사람을 모셨습니다.”


의경세자와 귀성군이 동시에 문쪽을 바라보았다. 곧, 간소한 무복 차림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단정한 얼굴, 낮게 숙인 시선. 그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유자광이라 하옵니다. 장원 남이 공의 부름을 받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의경세자의 눈빛이 가늘게 빛났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무과 복시에서 남이와 겨뤘던 자로군. 무술이 뛰어났지. 얼자 출신이라 들었네만… 그날의 시연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네. 자네 눈이 살아 있었어.”


귀성군도 흥미롭다는 듯 잔을 들었다.


“남이, 자네와 이 사람은 어떤 사이인가?”


남이가 답했다.


“전장에서 제 곁에 두고 싶은 사람입니다. 출신은 다르오나 실력은 제가 본 이들 중 으뜸이었습니다. 그 마음과 검엔 거짓이 없었습니다.”


의경세자는 잔을 들어 천천히 술을 따랐다. 술잔을 유자광에게 내밀며 말했다.


“우리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자’를 귀하게 여긴다. 출신은 하늘이 정하지만 함께 갈 길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지.”


유자광은 잔을 받아 들고 잠시 머뭇댔다. 그 눈동자엔 갈등과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술을 입에 댔다.


… 진심인가. 나 같은 자에게 이런 잔이 오는 것이…

남이… 너는 왜 나를 이 자리에 불러낸 것인가…


<형제의 맹세>


잠시 뒤, 술자리가 물러나고 남이와 귀성군만이 남았다.

조선에서 가장 주목받는 세 남자가 남은 자리였다.


의경세자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남이, 사람을 보는 눈이 있구나. 하나…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그는 둘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형제다. 남이 역시 외척이라 하나, 나에겐 가장 가까운 형제와도 같다.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뜻이 맞으면 형제가 되는데 우리는 피까지 나눈 형제다. 왕가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일… 나는 그것을 끝내고 싶다.”


그의 말은 점차 무게를 더했다.


“나는 주상께 죄송한 마음이나… 지난 계유정변과 노산군 폐위, 그 일들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그런 일은 우리 세대에서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책임, 나 혼자 할 수 없다. 너희 둘이 도와주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도 함께 해주기 바란다.”


남이와 귀성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목소리로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저하!”


의경세자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득, 이마를 가볍게 짚더니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귀성군이 다가가 물었다.


“저하, 몸이… 불편하신 것입니까?”


의경세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을이 깊어지니, 숨이 자주 차오르네. 오래가진 않겠지.”


말은 가볍게 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어렸다.


“혹여 내가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거든… 내 동생 해양대군을 잘 보살펴 주게. 그 아이는 아직 너무 어리고 권세엔 서툰 나이다.”


남이와 귀성군은 놀라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저하,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반드시 대통을 이어받으셔야 합니다! 세종대의 영광을 다시 세우셔야 합니다!”


귀성군이 더욱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하께선 지혜롭고 인자하신 분이옵니다. 마땅히 주상의 자리를 이어야—”


의경세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귀성군, 말을 삼가게. 지금 주상께서 세종 할바마마보다 못하단 말인가?”


귀성군의 얼굴이 붉어지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뜻이 아니옵니다… 저하의 위덕을 높이고자 한 말일뿐…”


의경세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알아. 자네 진심을. 그 입심으로 궁녀들 마음을 휘어잡는다 하더니, 궁 안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더군. 주상 후궁 전까지 말이 오르내린다더니… 부디 언행을 조심하게.”


귀성군은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했다.


의경세자는 남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이, 자네는 믿음직하나… 그 강한 자신감이 가끔은 오만으로 보인다는 말도 들리더군. 주위를 좀 더 알뜰하게 살피게. 무인은 검보다 마음이 먼저여야 하네.”


남이도 고개 숙이며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저하!”


밤은 깊어가고, 세 사람의 술잔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밤, 세 사람의 의기와 맹세는 뚜렷이 뿌리를 내렸다.


의경세자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피로 맺은 형제이기는 하나, 뜻으로 맺은 형제는 피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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