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깊어가는 조선의 밤
제5화: 깊어가는 조선의 밤
창밖에는 달빛이 눈처럼 내려 별전의 처마를 희게 물들이고, 젊은 세 사람의 의기는 밤처럼 조용히 깊어갔다.
역사의 발자취는 아직 그들을 조용히 지나쳤으나, 그날 밤 별전에서 움튼 하나의 대화는 훗날 조선의 궤도를 비틀 수 있는 씨앗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형제애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일’을 품은 서약, 피보다 짙은 신념의 교류였다.
귀성군 이준은 그날도 별전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의경세자와의 담론은 밤을 밀어 새벽 끝에 닿았고, 안개처럼 깔린 조정의 정적 속에서 그는 문득 후원 담장 너머의 그림자를 보았다.
정빈이었다.
그녀는 궁인으로 입궐한 지 햇수로 이년, 총명함과 기품으로 주상의 눈에 들어 ‘빈’의 작호를 받았다. 아직 이십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는 조용한 기품 뒤에 열정의 불씨를 품고 있었다.
정빈 그녀는 귀성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이 돌아서려는 순간 정빈이 그의 손목을 조용히 붙잡았다.
“귀성군…”
그녀의 목소리는 하루 종일 속으로 삼켰던 말의 끝, 조심스러우나 단호했고 떨리나 간절했다.
“이제 그만두시지요.”
귀성군의 애타는 목소리가 주위 공기를 더 차갑게 만들었다.
귀성군 말은 낮았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듯했지만 그 속엔 숨기지 못한 고통이 서려 있었다.
“무슨 뜻이옵니까…?”
“전하의 빈이시라면 저와 마주하는 것조차…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빈은 눈을 떨구었다. 그리고 이내 눈물보다 먼저 웃음을 보였다. 슬프고도 정결한 결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어찌하여 지난달의 그 글은… 어찌하여 거짓이옵니까?
‘달빛 아래 그대 이름을 지우지 못하겠다’ 하신 그 필체… 그것이 허언이었단 말씀이옵니까?”
이준은 눈을 감았다. 그 새벽 붓을 들었던 자신이 낯설었다. 취기와 진심이 섞여 절제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그 편지는 제 잘못이었습니다. 부디… 그저 한 줄의 실수로 여겨 주십시오.”
그러나 정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단단히 쥐었다.
“실수라면… 저도 같은 잘못을 범했사옵니다. 만일 마음을 품은 것이 죄라면 저는 기꺼이 그 죄를 안겠습니다. 그 어떤 벌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도. 아니면… 그대가 다칠 수도 있습니다.”
이준은 그녀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손을 잡아둘 용기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짧은 만남은… 오래도록 누군가의 그림자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바로 내명부의 총책임 내관 권상지였다.
그는 단지 궁중 질서의 관리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보와 필체, 시선과 침묵으로 권력을 지배하는 자였다. 세자의 기류와 주상의 뜻 사이, 불꽃이 튈 틈을 좇던 그는, 마침내 그 틈을 보았다.
그날 밤, 그는 은밀히 비단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귀성군의 필체로 쓰인 연서가 놓여 있었다. 정빈을 모시는 궁녀를 통해 어렵게 구해놨다.
“정빈께. 달빛 아래 이름을 지울 수 없소. 이 마음은 가야 하나 눈빛은 남고 말았소. 계절이 흐를수록 그대는 더욱 가까워지고… 나는 더욱 도망치고 있소. — 귀성군 이준”
권상지는 조용히 그 글을 접었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그것은 단지 스캔들이 아닌 왕권을 뒤흔들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며칠 뒤, 의경세자는 귀성군을 별전에 조용히 불렀다.
“귀성군, 자네 이름이… 후궁 전의 내음 속에서 들리기 시작했네.”
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담겨 있는 것은 형으로서의 연민과 세자로서의 경계였다.
“전하의 눈과 귀는 생각보다 빠르네. 정빈은 이제 단지 한 여인이 아니라 궁정 질서의 일부라네.”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세자의 말이 옳았다. 그 누구보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지키는 길이 바로 그녀를 떠나는 길이라는 것을.
“… 그녀를 위해 멀어지겠습니다. 제 감정이 그리 큰 짐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의경세자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지. 그러나 자네가 조선을 책임질그릇이라면… 감정조차 정무처럼 다스릴 줄 알아야 하네.”
그날 밤 이후, 귀성군은 다시는 정빈 후원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빈은 그의 마지막 편지를 품에 안은 채 달빛 아래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말이 없었고 눈물도 없었다. 다만, 가슴속에 새겨 넣은 이름을 손끝으로 되짚으며 속삭였다.
“그대는 떠났으나, 나는 아직 여기 있습니다. 그대가 지우지 못한 이름… 나는 오늘도 매일 밤 새깁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다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권상지.
그는 내명부의 뜰을 지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달빛 아래 이름을 새긴 자 들아…
조선의 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