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 이름을 지운 자리
제6화 — 이름을 지운 자리
며칠 후, 깊어가는 가을밤.
정빈 유 씨는 조용히 붓을 들었다.
더는 귀성군을 불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무너지는 울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 감정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기 위해 스스로를 보내는 마지막 연서를 써 내려갔다.
귀성군 이준께
이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이, 제 불경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허락하지 않더라도, 제게 당신은 단 한 사람입니다.
제가 모든 것을 거슬렀습니다. 연서를 쓴 것도, 먼저 손을 내민 것도, 품은 마음조차 모두 제 쪽에서였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걸어가야 할 그 길에서 단 한 치도 물러나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당신이 무사히 걸어가기를 빕니다.
제 하루가 당신을 지우는 시간이라면 그 공백을 당신 이름으로 채우겠습니다.
ㅡ 정빈 유 씨 ㅡ
그 연서를 받아 든 귀성군 이준은 한동안 숨조차 고르지 못했다.
그녀가 모든 것을 짊어지겠다는 담담한 문장들 앞에서 그는 두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며칠 뒤, 그는 조복을 갖추고 세조 앞에 조용히 나아갔다.
깊은 밤, 침전의 불빛 아래 선 귀성군의 얼굴엔 결의와 체념이 나란히 엉켜 있었다.
“전하… 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나라의 법도 안에 있어야 할 신이 금기된 마음을 품었습니다.”
세조는 침묵한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긴 정적 끝에 물었다.
“그 여인, 지금도 네 마음 안에 있느냐?”
귀성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천천히 깊이 숙였다.
“그러하옵니다.
하나 이젠 제 마음 안에만 지니겠습니다.
모든 책임은 신에게 있사오니 부디 그녀에게 화가 미치지 않기를…”
세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내명부를 통해 모든 사정을 보고받은 뒤였다.
"정빈 유 씨가 먼저 연서를 보냈다고?"
진상이 무엇이든 세조는 궁중이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여인의 감정이 권력을 타고 귀에 들리는 순간 국정은 뒤 엉기기 마련이었다.
며칠 뒤, 내명부의 교지가 조용히 후궁 전에 떨어졌다.
“정빈 유 씨는 내명부 법도에 어긋난 처신을 하였기에 즉시 작호를 거두고 궁 밖으로 내칠지니 다시는 궁궐 안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항변하지 않았다.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앉아 스스로의 머리를 올려 묶고 비녀를 풀어낸 채 단정히 궁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날 아침,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귀성군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남겼다.
궁을 떠나는 이의 글이라기엔 담담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귀성군께
이제 저는 궁을 떠납니다.
다만 제 마음은 그 자리에 남겨두고 갑니다.
당신이 내게 말했지요.
"전하의 빈이라면 마주쳐선 안 되는 일이다."
그 말이 옳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제 아무의 누구도 아닙니다.
다만 기억해 주십시오.
한때 조선의 밤을 가로지르던 달빛 아래, 당신을 바라본 소녀가 있었다는 것을.
그대의 발걸음이 조선을 향할 때 그 발아래 한 사람의 이름이 조용히 사라졌음을.
당신은 지우고 저는 간직하겠습니다.
— 유 씨, 한때의 정빈 ㅡ
귀성군은 그 편지를 한동안 말없이 쥔 채 후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주 앉곤 하던 작은 평상은 이슬에 젖어 있었다.
정적만이 가을밤을 채우는 가운데 풀벌레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그날 이후, 정빈 유 씨의 이름은 궁중 기록에서 조용히 지워졌다.
빈의 작호는 폐지되었고 그녀의 흔적은 문서에서조차 지워졌다.
그러나 귀성군 이준은 그 이름을 끝내 부르지 못한 채 백지 위에 남긴 한 문장을 마음에 품고 살아갔다.
그대가 지우고 간 그 자리,
나는 평생 이름 없이 채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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