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소설- 조선의 아이돌 7

제7화 — 사랑보다 짙은 신념

by 초롱초롱 박철홍

제7화 — 사랑보다 짙은 신념


정빈이 떠난 후, 귀성군 이준은 긴 침묵 속으로 스스로를 가두었다. 조정은 그의 침묵을 두고 갖가지 말을 던졌다.


“속을 알 수 없는 군자라더라.”


“빈자리를 오래 지키는 자라더라.”


하나 그 어떤 말도 이준의 걸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한 여인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조선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세자의 병세는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세조는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궁궐 안팎으론 차디찬 권력의 기류가 흘렀고 대신들 사이에선 오래 묵은 갈등이 본격적인 분열로 번졌다.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하고, 참소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귀성군 이준은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어느 세력에도 기대지 않았다. 그는 다만 조선의 내일에 서 있었다.


“진실이 누구에게 속해 있든, 조선은 누구의 것입니까. 오늘이 누구의 승리냐가 아니라, 백성의 내일이 누구 덕에 지켜졌는가—그게 정사의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준의 말은 조정에 서늘한 물결을 일으켰다.


젊은 대신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노회 한 원로들은 그를 꺼려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두고 붙는 이름이 달라졌다.


‘책을 관통한 사내’,

‘침묵을 정치로 바꾼 자’,

‘걸어 다니는 신중함’.


세조는 어느 날 이준을 불러들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궁의 문을 흔들고 창호를 두드리던 밤. 두 사람 사이엔 허울 좋은 예의도 공치사도 없었다. 오직 오래된 피의 인연과 조선을 두고 맺은 각자의 계산만이 있었다.


세조가 말했다.


“귀성군. 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고 여기 있구나. 후회는 없느냐.”


이준은 답하지 않고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속 어디에선가 오래전 얼굴 하나가 떠오르다 사라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 제 마음이 정녕 하나의 여인에게 머물렀다면 조선은 제게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제 뜻은 조선 전체를 향해 나갈 뿐입니다. 저 하나의 감정을 죽여 이 나라의 바른 길을 가린다면 그것을 걷어내는 것이 신의 도리입니다.”


세조는 웃지 않았다. 다만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국정을 함께하는 신하를 보는 무게와 아끼는 조카를 마주한 연민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귀성군은 세조가 유일하게 사랑한 동생, 임영대군의 아들 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애틋했다.


그날 이후, 귀성군 이준은 대간의 감찰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 정치의 중심, 왕의 눈과 귀, 그리고 백성의 가장 먼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리.


그는 원칙을 들고 조용히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왕실의 권위가 흔들릴 때마다, 신료들의 이익이 궁궐 안을 물들일 때마다, 그는 군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학자들의 아첨은 피했고 대신들의 야욕은 잘라냈다.


하지만 그토록 절제된 사내가 울분을 드러낸 날이 있었다.


전염병이 도성에 번지던 해였다.


시장엔 쌀이 끊겼고, 성문 밖으로 아이의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의금부 대신들은 책임을 서로 미루었고, 의녀들은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 밤이면 관청에 불이 꺼지고 백성들은 차가운 집 벽을 짚으며 버텼다.


그날 밤, 이준은 홀로 궁을 나섰다. 변복을 한 채 광통교 아래 쪽방촌으로 향했다. 그곳은 도성에서도 가장 낮고 가장 어두운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 아이의 시신을 보았다. 볼에 흙이 묻은 채 조용히 굶어 죽은 아이.


이준은 망설임 없이 외투를 벗어 아이의 몸을 덮었다. 몸이 가눌 길 없이 흔들렸다.


이튿날 아침, 이준은 조정에 올라 상소를 바쳤다.


“사람의 목숨이 이리 가볍게 지워진다면, 조선의 법도와 명분은 무엇을 지키는 것입니까. 어젯밤, 신은 도성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값진 죽음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소리를 듣고자 하옵니다.”


그 상소는 <귀성군 상소>라 불리며 후세까지 전해졌다.


정치 중심에 선 그의 무게는 점점 조정에 돌처럼 내려앉았다. 누구도 쉽게 그와 대적하지 못했고 왕조차 그의 침묵을 경계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조는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이 나라 정무를 그대에게 맡겨도 되겠구나.”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오래된 궤짝을 열고 한 장의 연서를 꺼내 들었다.


손때가 누렇게 배인 종이, 아직도 선명한 필체. 그 안에 담긴 이름은 정빈 유 씨. 그녀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고 오직 그 글씨 속에서만 살아 있었다.


그가 사랑을 택했다면 지키지 못했을 나라.


그가 나라를 택했기에 지키지 못한 마음.


귀성군은 창을 닫고 연서를 접었다.


그리고 다시, 조선이라는 무거운 길 위에 자신의 발을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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