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압록강을 건넌 그림자
제8화. 압록강을 건넌 그림자
한겨울이었다.
바람은 얼음처럼 매서웠고, 하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먹빛 구름을 이고 다녔다.
그즈음, 남이는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이름은 하찮아도, 실상은 왕의 뜻을 들고 움직이는 자리였다. 전하의 입과 손을 대신해 조정과 군영을 오가는 길, 그것은 곧 권력의 그림자 속을 걷는 일이었다.
한편, 유자광은 훈련도감 예하 충순 위 부정(副正)으로 발탁되었다. 실전 병력을 관할하고, 무기고의 열쇠를 쥔 자리. 조용한 겉모습 아래 날 선 검이 숨겨진 요직이었다.
어느 날 밤, 유자광은 낡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가 멈춰 선 곳은 기와지붕이 낮게 드리운 한 저택. 그 안엔 병조참판 허종, 그리고 권세가 한명회가 앉아 있었다.
“남이와 귀성군 그리고 세자와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지?”
한명회가 말했다. 눈빛은 짐승처럼 예리하였고 말끝은 나직했으나 울림은 깊었다.
유자광은 시선을 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명회의 눈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불꽃처럼 번진 시선. 그러나 유자광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 눈에 자네는 들었는가?”
“아직은… 아닙니다.”
한명회가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은 호탕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스산했다.
“그렇다면 눈이 아닌 그림자 속에 들어야겠군. 세상 사람은 언제나 밝은 곳만을 보는 법이니.”
유자광은 말이 없었다. 마음 한 구석이 조용히 울렸다. 그날 밤, 술은 흘렀고, 맹세는 잔을 타고 오갔다. 그러나 그것이 우정에서 비롯된 연대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이 빚은 공모였는지 유자광은 아직도 단정할 수 없었다.
“남이는 민심을 얻고, 유자광은 병권을 쥐었군.”
허종이 나직이 말했다. 눈은 여전히 한명회를 향해 있었고 그 입가엔 얇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로 견제하니 어느 한쪽도 날뛰지 못할 것이네.”
한명회가 응수했다. 그 말은 마치 장수를 조련하는 책사의 말 같았다.
그러나 실상 정작 당사자인 남이와 유자광은 서로를 견제하기는커녕 불완전한 신뢰 위에서 조심스레 손을 맞잡고 있었다.
세조는 자주 남이를 가까이 불렀다. 비록 선전관이란 하위 관직일 뿐이나 세조는 남이에게 군영의 계획과 북방의 정세를 묻고 논했다.
그날도 그러했다. 병조판서 한확, 참판 허종과 더불어 남이를 불러들였다.
“압록강 일대, 야인의 동향이 예사롭지 않다.”
세조가 낮은 목소리로 운을 띄우자 남이는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다.
“신이 본 바, 북방 유목세력의 일부가 야인과 연계하여 세력을 병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자네가 그 땅을 직접 순시할 수 있겠는가?”
조정은 술렁였다.
이는 단순한 시찰이 아닌 왕의 명을 지닌 군사 사찰이었다.
그 순간부터 이십 대가 갓 넘은 남이는 ‘왕의 눈’이자 ‘검’이 되었다.
그날 밤, 허종은 조용히 유자광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묵묵히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병영위치와 지형정보가 자세히 그려진 비밀문서였다.
“원래는 병조가 관할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 군의 눈과 귀가 되려 하지.”
허종의 목소리는 조용하되 날카로웠다.
“그 검이 어디를 겨누게 될지 모를 일이다. 대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유자광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만일 그 검이… 남이라면, 대감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허종은 피식 웃었다.
“칼은 벼리는 데 시간이 걸리지. 하지만 때론… 칼집을 먼저 만드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네.”
그 말은 오래도록 유자광의 마음에 남았다.
남이는 조용히 붓을 들었다. 왕이 명한 좌우익 병권 추천 명단. 지도 한 편에, 그는 유자광의 이름을 써넣었다.
그 이름을 다 쓰고 나서야 남이는 유자광을 불렀다.
“자네만이 내가 믿을 수 있는 검이네.”
그 목소리는 단단했고 두 눈엔 흔들림이 없었다. 남이는 유자광이란 검이 자신의 뜻 아래에서 정확히 움직일 것이라 믿었다.
다음 해 초봄,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마자 남이는 병력을 이끌고 북방으로 떠났다.
숨죽였던 국경의 기운이 봄바람과 함께 다시 일렁이고 있었다.
북방초소에 도착한 남이는 곧 병사들을 점검하고 지휘체계를 다잡았다.
유자광은 병영 전반을 조율하며 조용히 병권을 움켜쥐고 있었다.
“상황은 어떤가?”
남이의 물음에 유자광은 침착하게 지도 위의 점 하나를 가리켰다.
“야인들의 출입이 빈번합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들이 늘었고 수상한 동향이 감지됐습니다.”
“이대로 두면?”
“전쟁의 불씨가 될 겁니다.”
한밤중, 병영 안에 불길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부에 적이 있다.”
“누군가 정보를 팔고 있다!”
급히 진상조사가 시작되었고 이내 몇몇 병사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중엔 군사 문서와 병장기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배후를 찾아야 한다.”
남이는 단호히 말했다.
유자광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단순한 국경 소요가 아닙니다. 내부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정의 싸움이… 이곳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겠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음은 굳었으나 믿음은 조심스러웠다.
그날 밤, 달빛이 창끝에 걸려 길게 드리웠다. 남이와 유자광은 병영을 천천히 거닐며 말없이 함께 걸었다.
“이 싸움은 칼로만 이길 수 없습니다. 정보와 신뢰가 필요합니다.”
유자광의 말에 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네는 나의 활이 되고… 나는 자네의 칼이 되겠지.”
두 사람의 그림자가 눈밭 위로 길게, 겹쳐졌다.
그 그림자는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밤만큼은 한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