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전성기 7 ㅡ 장수왕 2(주요 업적)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37
ㅡ 고구려 전성기 7 ㅡ
(장수왕 2ㅡ 주요 업적)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과 평양 천도
[長壽王, 諱巨連.一作璉. 開土王之元子也. 體貌魁傑, 志氣豪邁.]
장수왕(長壽王)은 이름이 거련(巨連)이며 ‘연(璉)’이라고도 한다.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체격이 크고 용모가 준수하며 뜻과 기상이 호걸을 뛰어넘었다.
ㅡ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조 ㅡ
1. 패왕의 기질을 지닌 군주
일반적으로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사업을 마무리하고 내치와 남진정책에 집중한 ‘수성(守成)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광개토대왕처럼 대규모 정복전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았으며 한동안 내정 강화에 주력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장수왕만큼 강력한 정복군주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의 아버지 광개토대왕 이외에는 비견할 인물이 없을 정도였다.
장수왕은 조상들 두 원수인 '북연'(北燕)과 '백제'의 수도인 '화룡성'(和龍城)과 '위례성' (慰禮城)을 각각 불태우고,
북연의 황제 '풍홍'(馮弘)과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을 직접 죽여 조상들 한을 풀었다.
또한 신라의 '실성' 마립간 죽음과 '눌지' 마립간 즉위에도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 '비유왕'(毗有王)이 장수왕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즉, 장수왕은 최소 2명에서 많게는 4명의 외국군주를 교체시킨 동시대에서 보기 드문 패왕형 정복군주였다.
그의 시대에 백제는 신라의 도움 없이는 멸망을 면하기 어려웠고,
신라 또한 백제의 원조가 없었다면 고구려군 공세에 경주까지 위협받을 뻔했다.
그야말로 고구려가 삼국통일의 기회를 잡았던 절호의 시기였다.
2. 고구려의 위상과 장수왕의 과제
장수왕 시기의 고구려는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가 직면한 과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넓혀놓은 광대한 영토를 안정시켜야 했고,
흡수한 북연 세력의 관리,
평양천도로 인한 신·구 귀족 간 갈등, 북방 물길(勿吉)·여진족의 발흥, 중국 북위(北魏)의 압박,
그리고 '나·제동맹'(신라와 백제의 연합) 등 복잡한 대내외 위기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이 모든 과제를 훌륭히 조정해 낸 결과 고구려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동아시아의 초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3. 남진정책과 평양 천도
장수왕(재위 413~491)은 남쪽으로의 세력 확장을 추진하며 남진정책을 본격화했다.
그는 중국 세력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외교를 통해 평화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모든 군사적 역량을 남쪽의 백제와 신라로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427년, 고구려 수도를 '국내성'(國內城, 오늘날 중국 지린성 집안)에서 '평양' (平壤)으로 옮겼다.
이 천도는 단순한 전략적 이동이 아니라, 남진정책 전초기지 구축과 함께 왕권강화 및 귀족 견제라는 정치적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즉, 기존 국내성 중심 구귀족 세력 약화시키고, 새로운 평양세력을 기반으로 중앙집권체제와 강력한 왕권을 재정립하려는 의도였다.
4. 천도 이후의 혼란과 내적 갈등
그러나 평양 천도는 순탄하지 않았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뒤 오랜 기간 내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기록이 거의 없다는 건, 당시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뜻이에요. 국내성파와 평양 세력 간의 갈등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ㅡ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ㅡ
장수왕 재위 기간 중 직접적인 내전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천도와 왕권 강화 과정에서 국내성 기반 구귀족 세력과의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로 인해 장수왕 초기 수십 년간은 내정불안과 내부긴장이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남진정책을 표방하며 427년에 천도를 단행했지만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것은 무려 475년 약 50년 뒤 일이었다. 이때 장수왕 나이는 이미 80세에 달했다.
또한 464년, 남쪽 국경에서 고구려군 100여 명이 백제군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장수왕은 즉각적인 보복 대신 오랜 침묵으로 대응했다.
이는 남진정책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내부 문제로 전력 투입이 어려웠던 정황으로 해석된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시기적 공백이 천도 이후의 내적 혼란과 귀족 갈등, 혹은 정복지 반란진압 등으로 인해 전면전 수행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본다.
5. 평양 천도의 근원과 배경
평양 천도는 장수왕 개인의 결단만이 아니라 이미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준비된 국가적 장기 정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은 즉위 2년째에 평양에 절 9개를 건립하였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영락 9년과 14년에 왕이 직접 평양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대사회에서 절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사회망과 행정 기반을 구축하는 거점 기관이었다.
이러한 기록은 광개토대왕 때 이미 평양을 차기 수도 후보지로 개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 평양의 전략적 가치
기존 수도 국내성은 지형적으로 험준하여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위나라 '관구검' 침입(동천왕대 비류성 전투)에서 함락된 전례처럼, 외세침공 시 취약점이 드러난 지역이었다. 또한 산지가 많고 평야가 좁아 농업 생산력이 낮고 혹독한 기후로 생활 여건이 좋지 않았다.
반면 평양은 풍부한 황해도 평야를 배경으로 한반도 중서부의 중심지였으며, 고조선과 낙랑의 옛 수도로서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한 유서 깊은 지역이었다.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고구려는
① 남진작전의 병참기지 확보,
② 식량·인력 동원 효율성 강화,
③ 왕권 재편과 국가 중심부의
재정비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 달성할 수 있었다.
7. 나·제동맹 성립과
중원고구려비
장수왕 천도와 남진정책으로 한반도 정세는 크게 요동쳤다.
위기감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433년,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손을 잡고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체결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군, 특히 개마무사(蓋馬武士)는 동아시아 최강 기병부대로 현대 전차부대에 비견될 만큼 막강했다.
따라서 나·제동맹 형성되었음에도
백제와 신라의 군사력은 고구려를 감히 대적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 고구려의 세력은 충주 (忠州) 일대까지 미쳤다.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에는, 예전 주민들이 빨래판으로 쓰던 돌이라 전해지는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서 있다. 이 비석에는 남한강 유역 즉 신라 영토였던 지역이 고구려 지배하에 들어갔음을 증명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는 장수왕 남진정책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8. 맺음말
장수왕은 고구려 전성기를 완성한 군주였다. 그의 과감한 남진정책, 평양천도는 단순한 수도 이동이 아니라, 동아시아 패권을 향한 고구려의 전략적 재편이었다.
그러나 천도과정에서 비롯된 귀족 갈등과 내부 긴장은 후대 고구려 정치의 불안요소로 남아, 결국 멸망기까지 이어지는 잠재적 균열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왕 시대의 고구려는 군사력, 영토, 문화, 외교 모든 면에서 동아시아를 제패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유업을 잇고 고대 한민족사 가장 찬란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ㅡ 초롱박철홍 ㅡ
충주중원고구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