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전성기 6, 장수왕 1ㅡ 세월을 다스린 왕)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36
ㅡ 고구려 전성기 6 ㅡ
(장수왕 1ㅡ 세월을 다스린 왕)
광개토대왕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랐다. 그리고 서른아홉, 인생의 절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동안 고구려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드리웠다.
젊은 왕들 시대가 그렇게 스러져 갔다.
그러나 이 흐름을 거스른 이가 있었다.
'장수왕!'
그는 세월을 이기고 생을 길게 이끌었다.
고구려에는 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무덤이 자리한 땅 이름을 묘호로 삼는 전통이 있었다.
‘미천’ 강가에 묻혀 미천왕,
‘고국원’ 언덕에 묻혀 고국원왕,
‘소수림’ 숲 속에 묻혀 소수림왕, 이라 부른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장수왕은 달랐다.
그의 묘호는 땅 이름이 아니라 세월의 이름이었다.
그는 너무도 오래 살았다.
신하들은 그의 생애를 기려
‘길다’는 뜻의 長(장)과 ‘목숨’의 壽(수)를 합쳐 그를 '장수왕' (長壽王)이라 불렀다.
그는 아흔여덟 해를 살았고,
그중 일흔아홉 해를 왕좌 위에서 보냈다. 그의 인생은 곧 하나의 시대였다.
사실, 기록만 놓고 보자면 고구려 제6대 태조왕이 93년 재위에 11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나 이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다.
진정으로 세월을 다스린 왕은 장수왕이었다.
그는 광개토대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왕위를 이었다.
역사에서 한 나라 운명을 바꾸는 세월은 흔히 3 대(三代) 정도가 흘러야 한다고 한다.
고구려의 첫 번째 대는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킨 형제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었다.
두 번째 대는 그 힘을 모아 천하를 휘어잡은 '광개토대왕'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대 확장된 나라를 다스리고 질서를 새로 세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장수왕'이었다.
5세기의 고구려는 산이 숨 쉬고 강이 노래하던 나라였다. 동방의 천하가 고구려 중심으로 돌았다.
하늘 높이 솟은 기세 속에서
고구려는 당당히 외쳤다.
“천하는 곧 우리다.”
그러나 그 찬란한 빛 뒤에는 언제나 그늘이 드리웠다.
넓어진 영토의 무게 끊임없이 부활하는 중국 남북조 그림자,
그리고 틈만 나면 덤벼드는 백제와 신라, 가야의 도전.
고구려 사방은 평화로울 틈이 없었다.
그럼에도 장수왕은 긴 세월 동안 이 난세를 헤쳐 나갔다. 그는 지략이 깊고 결단이 단단한 왕이었다. 그의 시대에 고구려는 다시 한번 천하 중심에 섰다.
사실 장수왕의 시대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이는 단순한 천도가 아니었다. 국내성 귀족들 오래된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단단히 다지려는 결단이었다.
그는 또한 북방정책 일변도의 틀을 깨고 남벌(南伐)을 선언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다.
만약 그가 한 걸음만 더 내디뎠 더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 이름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의 한반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평양천도 이후, 오랫동안 내부의 갈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통일의 기회는 그렇게 천천히 흩어졌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평양천도를 기점으로 고구려 국호는 ‘고려(高麗)’로 굳어졌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려태왕 (高麗太王)’ 이라 새겨져 있고, 중국 사서들 또한 이때부터 고구려를 ‘고려’라 불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왕건 고려가 세워지자, 옛 고구려는 다시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삼국사기'가 그 증거다.
오늘날 학자들 중 일부는 이를 구분해 ‘전고려(前高麗)’와 ‘후 고려(後高麗)’라 부르자 주장하지만 우리 민족 기억 속에서 두 나라는 이미 각자 이름으로 살아 있다 — 고구려와 고려.
장수왕은 오래 살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남은 것은 그의 지략과 신중함이었다.
그는 전쟁 앞에서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전쟁은 언제나 계산된 승리였다.
훗날 조선의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전투 철학과 닮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백제정벌'이다. 그는 칼을 빼들기 전에, 먼저 마음의 틈을 노렸다.
그리고 그 틈새에 첩자 하나를 심었다.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불씨였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장수왕은 ‘도림(道琳)’이라는 승려를 보냈다. 그는 망명객으로 가장해 백제의 수도에 들어갔다.
바둑을 즐기던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그는 궁궐이 낡고 좁다며 새로 지을 것을 권했다.
백제 '개로왕'은 그 말을 곧이들었다. 백성들은 강제로 동원되었고, 화려한 새 궁궐이 지어지는 동안 나라 재정은 무너졌다. 민심은 흩어졌고, 국력은 쇠하였다. 그때 '도림'은 미소를 지었다. 임무를 완수한 그는 몰래 고구려로 돌아와 장수왕에게 보고했다.
“지금이 바로 때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대군이 남하했다. 백제는 무너졌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옛 원한이었던 '고국원왕'이 백제군에게 전사한 그날의 슬픔을 갚았다. 백제는 수도 한성을 잃고 '웅진'(공주)으로 물러났다.
그날 이후 역사는 달라졌다.
그리고 장수왕 이름은 한 시대 정점으로 남았다.
장수왕은 철저했고 냉철했으며 끝내 승리했다. 그의 전쟁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계산된 기다림 속의 영광이었다.
이제, 그의 긴 생애가 남긴 또 다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이어서 장수왕의 업적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