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최고전성기 1 ㅡ(소지왕과 지증왕 편)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3
ㅡ 신라최고전성기 1 ㅡ
(소지왕과 지증왕 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백제·신라 삼국 가운데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가 오늘날과 같은 국가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초, '지증왕'(재위 500~514) 시기였다. 이때 비로소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최고 통치자 칭호를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다.
이전 편에서 제17대 '내물왕'까지 역사를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내물왕 이후부터 지증왕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신라 중앙집권 체제를 다져온 왕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내물왕 이후 지증왕까지 네 왕>
1. 18대 실성 마립간 (재위 402 ~417)
내물왕의 아들이거나 근친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간섭을 받으며 신라를 다스렸다.
2. 19대 눌지 마립간 (재위 417 ~458)
실성왕을 몰아내고 즉위했다. 고구려 영향에서 벗어나 백제와 우호 관계를 모색했다.
3. 20대 자비 마립간 (재위 458 ~479)
국력을 회복하고 지방세력을 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4. 21대 소지 마립간 (재위 479 ~500)
이름만큼이나 신라사에서 비 교적 친숙한 왕으로 실질적인 개혁과 외교적 성과가 많았다.
1) 소지왕의 치세와 업적
소지왕 재위기간에는 고구려와 왜(일본)가 신라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에 신라는 백제· 가야와 협력하여 방어하였고, 백제 '동성왕'(493년)과 혼인 동맹으로 상호 군사원조 체계를 마련했다. 또한 가야 및 중국과도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행정적으로는 자비왕 때 추진된 도시 정비 계획을 이어받아 487년 각 지역에 ‘우역(郵驛)’을 설치하였다. 이는 관의 명령이나 공문을 전달하던 시설로, 오늘날 우체국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제도였다.
또한 490년 서라벌에 시장을 개설하여 물자 유통기반을 마련했다. 이처럼 소지왕은 국가 체제 정비와 경제적 기반 확립에 큰 업적을 남겼으나, 후대 지증왕 개혁에 가려 상대적으로 평가가 미미하다.
2) 소지왕은 신라가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는 전환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정책은 신라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다만 아들이 없어, 장인인 '갈문왕' 아들, 즉 '지증왕'이 뒤를 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6촌 관계, ‘삼국유사’에서는 5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사실상 소지왕 처남이었다.
1989년 발견된 영일 냉수리 신라비를 근거로 학계에서는 소지왕이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지증왕 세력에 의해 유폐·사망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3) 소지왕과 ‘사금갑(射琴匣)’ 설화와 정월대보름 유래
소지왕과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삼국유사' 사금갑조에 전한다.
어느 날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났다.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십시오.”라고 하자, 왕이 이를 쫓았다. 남쪽 피촌에 이르렀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던 왕에게 한 노인이 글이 든 봉투를 바쳤다. 겉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점쟁이가 “한 사람은 왕을 의미한다”라고 하자, 왕은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 갑을 쏘라’는 글귀가 있었다.
왕이 급히 궁으로 돌아가 거문고 갑을 쏘자 그 안에서 왕비와 승려가 밀회를 나누다 숨어 있었다. 왕은 그 둘을 처형했고,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후 신라에서는 매년 정월의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上午) 일에는 길흉을 가려 행동을 조심했고, 정월 대보름(오기일) 에는 찰밥을 먹고 잠을 자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고 전한다.
5. 제22대 지증왕(재위 500~ 514)
소지왕의 뒤를 이은 지증왕은 신라 제22대 왕으로 63세의 고령으로 즉위하였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늦은 나이에 즉위한 왕 중 한 명이다.
'삼국유사'에는 지증왕에 대한 독특한 일화가 전한다.
지증왕은 음경의 길이가 1자 5치(약 40cm)에 달하여 배필을 구하기 어려웠다. 사자를 지방에 보내 수소문하던 중, 개들이 엄청나게 큰 똥 덩어리를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고 수소문 끝에 '모량부'의 한 여인이 키가 7자 5치(약 225cm)에 달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는 왕의 위엄과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설화로, 실제보다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증왕의 주요 업적>
1) 국호를 ‘신라’로 확정
그동안 국호를 여러 명칭(사로국, 서라벌 등)을 통합해 ‘신라’를 공식 국호로 삼음으로써 국가 정체성과 정치적 통일성을 강화했다.
2) 왕호를 ‘왕’으로 변경
기존의 ‘이사금’ 호칭을 폐지하고 ‘왕’을 사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다.
3) 우경(牛耕) 장려
소를 이용한 농경을 적극 장려 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국가경제 기반을 강화했다.
4) 지방행정 정비
주·군 단위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 통제력을 확대했다.
5) 순장(殉葬) 금지
상류층이 죽을 때 사람을 함께 묻는 악습을 폐지하여 인명보호 와 인권의식 발전에 기여했다.
6) 우산국 복속
현재의 울릉도 지역인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의 영토와 영향력을 동해안으로 확장했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에 나와 지증왕이 유명해졌다.
7) 맺음말
지증왕 개혁은 신라가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개혁적 기반 위에서 '법흥왕'과 '진흥왕' 시기 찬란한 전성기가 열렸다.
그렇기에 '소지왕'과 '지증왕'은 신라사 중흥을 준비한 전환기 핵심 군주라 할 수 있다.
다음 편은 신라의 전성기 2 — 법흥왕과 진흥왕 편으로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첫 번째 사진은 역사유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