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쇠퇴기 1 ―(장수왕 이후의 왕들)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7
― 고구려 쇠퇴기 1 ―
(장수왕 이후의 왕들)
20대 장수왕(재위 413~491)은 고구려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고구려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점차 정체기에 들어서며 결국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 중국 대륙에서는 한족 중심 통일왕조인 '수'와 '당'이 차례로 등장하여 고구려를 침략했다. 비록 '을지문덕'과 '양만춘' 활약으로 침략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두 차례 대전쟁은 고구려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다.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압박했다. 특히 신라는 6세기 이후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 한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 일대까지 진출하게 된다.
장수왕 이후의 고구려 왕들을 통해 쇠퇴 과정의 흐름을 살펴보자.
1. 제21대 문자명왕 (재위 491~519)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이자 태자 '고조다'(高助多) 아들이었다. 장수왕이 너무 오래 살아서 태자였던 고조다는 70세 무렵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결국 손자인 '문자명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일종의 ‘태손 즉위’였던 셈이다.
문자명왕이 즉위할 당시 나이는 약 60세로 추정된다. 장수왕이 무려 97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이다.
태자 '고조다' 이름과 관련 흥미로운 설 중 하나로 속어 ‘쪼다’(한심 하다의 뜻)가 고조다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태자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가능성이 낮다. 왕태자 이름을 함부로 백성이 놀림말로 썼을 리 없고, 무엇보다 5세기 북방발음은 현대어와 전혀 달라 지금 ‘조다’와 직접 연결하기 어렵다.
'고조다'는 단지 왕위에 오르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 아니라, '장수왕' 말년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핵심 인물로 보인다. 장수왕이 90세를 넘기며 국정을 직접 챙기기 어려워지자 태자 고조다가 대외정책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증거로 '충주중원고구려비'가 있다. 이 비석은 장수왕 시기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지역(충주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여기에는 고조다가 이 지역에서 고구려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깊이 관여한 흔적이 보인다.
즉, 고조다는 장수왕 후계자로서 군사·정치 양면에서 경험을 쌓은 실력자였다.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사실상 고구려 남진정책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영국 찰스 3세가 노년에 즉위한 것처럼 고조다는 그조차도 이루지 못한 경우다.)
<문자명왕의 치세>
문자명왕 시기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큰 전쟁은 없었고, 외교적으로도 안정된 국제질서 속에서 균형을 유지했다.
494년에는 부여 왕과 그 일족을 받아들이며 북방세력까지 포용했다. 남쪽으로는 나제연합군과 영토 분쟁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국세를 안정시킨 시기였다.
일부 학자는 문자명왕 때 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넓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2. 제22대 안장왕 (재위 519~531)
안장왕은 문자명왕 아들로, 고구려 전성기의 마지막 명군으로 평가된다. 부왕 시절 백제에 밀리던 전세를 다시 뒤집고, 군사적으로 우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안장왕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면서 고구려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한다.
3. 제23대 안원왕 (재위 531~545)
안원왕은 문자명왕 차남으로, 형 안장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일본서기'에는 안장왕이 시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져 왕위계승 과정 혼란을 짐작케 한다.
안원왕은 체격이 장대하고 도량이 넓은 인물로 전해진다. 그의 치세는 대체로 평화로웠으며 북위와 양나라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재위 말년 자연재해와 귀족 간의 권력다툼이 이어지면서 국가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본격적인 쇠퇴의 서막이 되었다.
4. 제24대 양원왕 (재위 545~559)
양원왕은 안장왕 아들이다. 총명하고 호방한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통치 시기 고구려는 대내외적 위기에 시달렸다.
특히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급부상하면서,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로써 광개토대왕 이래 100여 년간 이어진 고구려 전성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5. 제25대 평원왕 (재위 559~590)
평원왕은 대중에게는 '평강공주 아버지, 온달의 장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내란으로 무너져가던 고구려를 재정비한 중흥군주였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담력이 있고 활쏘기에 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원왕은 민생 안정에 힘써 백성을 구휼하고, 농업 진흥과 세금 완화를 추진했다. 또한 장안성 축성을 일시 중단하는 등 민심을 어루만지는 정책을 폈다.
586년에는 수도를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겼다.
평원왕 재위 후반, 북주의 뒤를 이어 '수나라'(581)가 건국되고, 589년 남조 진을 멸망시키며 중국을 통일했다. 이로써 고구려가 수세기 동안 유지해 온 ‘양팔외교’(중국 내 두 강대국 사이에서의 중립외교)는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평원왕은 이에 대응하여 남쪽의 신라와의 대립을 일단락하고, 서북방 안정을 우선시했다.
진흥왕 '황초령비'(568)와 '마운령비'에 따르면, 신라는 한반도 중부는 물론 함경도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고구려 역사상 신라가 함흥지역까지 차지한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추가 충돌을 자제하고 북방대비에 집중했다.
이러한 평원왕의 전략적 판단은 훗날 영양왕 대의 수나라 침략 대비책으로 이어졌다.
즉, ‘살수대첩’(612년)의 승리는 이미 평원왕 시절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평원왕 시기의 대표적 인물로는 장수 '온달'이 있다. 그는 고구려 명장으로 봉성온씨의 시조이며, '삼국사기'에 실릴 정도로 실존 인물이다. 그의 아내 평강공주는 평원왕의 딸로 전래동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바보 온달’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용맹한 장수였으며 평원왕 신뢰를 얻어 전장에 나섰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신분과 사랑, 의리와 충성의 가치가 담긴 고구려 사회상을 반영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6. 맺음말
이처럼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을 거치며 안정기에서 서서히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양원왕 대에는 한반도 중부를 잃고, 평원왕 대에는 중국 통일 왕조 수나라의 위협에 직면한다.
다음 편에서는 평원왕 딸 <평강공주와 온달의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수나라와의 전쟁, 나아가 역사적인 '살수대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