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9

고구려 쇠퇴기 3 ㅡ(수나라 침략과 영양왕, 그리고 을지문덕 1)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9

ㅡ 고구려 쇠퇴기 3 ㅡ

(수나라 침략과 영양왕, 그리고 을지문덕 1)


우리 역사 속에서 고구려라는 거대한 산맥을 떠올리면, 그 봉우리에는 언제나 두 이름이 아른거린다.


한 사람은 정복의 불길을 휘두른 '광개토대왕', 또 다른 한 사람은 살수의 물안개 속에서 수나라 대군을 몰락시킨 '을지문덕'이다.


오늘은 그 이름들 뒤편, 조용히 그림자처럼 서 있으면서도 온 나라 운명을 짊어졌던 한 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로 고구려 '영양왕'이다.


우리는 보통 큰 전쟁에서 승리 순간 앞에 선 장군을 더 찬란하게 기억한다. 그 장군이 칼을 들고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눈에 더 선명히 박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국경 너머 폭풍을 가장 먼저 느끼고, 그 바람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 사람은 대개 당시 최고지도자이다. 그들의 판단력, 정치, 외교가 흔들렸다면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승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조와 이순신 사례는 드문 예외다.


'을지문덕'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승리로 빛났던 그 뒤에서

그를 발탁하고 기회를 열어 준 왕,

고구려 명줄을 움켜쥐고 흔들림 없이 버텨낸 왕, 그가 바로 고구려 제26대 태왕 영양왕 (590년∼ 618년)이었다.


1. '영양왕'이라는 인물은?


'영양왕'은 '평원왕' 아들이며,

온달과 사랑을 나눈 평강공주와 친남매지간이었다.


영양왕 재위기간은 고구려 운명이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리던 시대였다. 수 문제에서 수 양제에 이르기까지 통일 중국이 네 번이나 2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덮친 시간이 영양왕 재위기간과 정확히 겹친다.


우리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한 번 침략한 것으로 알지만 네 번이나 침략했다.


2. 팽창하는 고구려, 흔들리는 중국


우리는 흔히 광개토대왕 시절을 거쳐 문자명왕 시대가 고구려 최대 영토를 가진 것으로 배워왔 지만, 영양왕 시대야말로 고구려가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을 때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거란과 말갈, 북방의 거친 바람을 타고 다니던 무리들이 고구려에 흡수되기 시작했고, 고구려 국경 은 요하를 넘어 요서 깊은 곳까지 닿았다.


‘구당서’는 당시 고구려 동서 길이를 3,100리라 적었다.


당시 중국을 막 통일한 수나라는 고구려의 이 거대한 확장을 두려워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로 칼을 겨눈 이유는 괜히 그런 건 아니었다. 고구려가 무섭게 성장하면서 수나라 국경까지 먼저 침범해 왔기 때문이었다.


3. 영양왕의 전략, 혹은 조용한 지휘


영양왕은 정면 승부만을 고집한 왕이 아니었다. 변방 어지럽히는 거란과 말갈을 단련된 도구처럼 사용했고, 수나라 긴 보급로를 끊어가며 거대한 군대의 숨을 하나하나 조였다.


당시 전쟁은 무력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적의 마음을 흔들고, 길을 막고,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승리했다.


<을지문덕 살수대첩>은 그 모든 계산과 흐름 마지막 절정이었다.


4. 내정에서 드러나는 영양왕의 품격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고구려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기근도, 폭동도, 심각한 내란도 없었다. 전쟁 불길 속에서도 나라가 안정을 유지했다는 것은 영양왕이 그만큼 견고한 중심을 잡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영양왕은 귀족들의 힘이 강하던 시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 뼈대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문화를 잊지 않았다.


역사서 ‘유기’를 정리해 '이문진'으로 하여금 '신집 5권'을 편찬하게 했다. 칼끝이 나라를 지킬 때, 붓끝은 나라의 정신을 지킨 셈이다.


5. 수나라와의 네 번의 격돌


앞서 말했지만 수나라는 고구려를 단 한 번만 침략한 것은 아니었다.

총 네 번에 걸쳐 침략해 왔다.

그때마다 영양왕 판단은 때로는 과감했고, 때로는 놀라울 만큼 치밀했다.


첫 번째 전쟁은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고구려가 유리한 흐름 속에 마무리했다.


두 번째 전쟁에서는 고구려 존망 걸린 순간, '을지문덕'과 영양왕 동생 '고건무'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그 결과가 바로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살수대첩'이었다.


이처럼 영양왕은 6세기 중엽, 수나라 침략으로 흔들리던 고구려를 다시 크게 일으켜 세운 고구려 명군이었다.


6. 후대의 왜곡된 평가


그러나 조선 시대로 내려오면서 영양왕 이름은 불편한 시선 속에 갇혀 버린다. 조선의 고리타분한 성리학자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아버지로 모시는 중국을 건들어 침략받은 것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역사서 '동국통감'에 나오는 영양왕을 평가한 내용이다.


[영양(嬰陽)은 처음 즉위(卽位)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할 뜻을 두었으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는 의리를 알지 못하여, 말갈(靺鞨)과 작당하여 상국(上國)을 침략하였으며, 수(隋) 나라 문제(文帝)가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함에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였으니, 의당 순리를 본받아 죄를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바야흐로 또 신라를 치고 백제를 침범하여 병화(兵禍)를 좋아하였으므로, 다시 수나라 양제(煬帝)의 토죄(討罪)를 빚게 한 것이며, 백만 대군이 요갈(遼碣)을 지나 살수(薩水)를 건너와서, 소혈(巢穴)을 공격해 전복시키는 것이 목전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응변(應變)과 양현감(楊玄減)의 반란이 없었더라면,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었습니다.]


참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역사 서술이다. 마치 침략당시 수나라 입장에서 쓰인 역사서를 보는 것 같다.


아무리 조선 성리학자들 한계라고 이해하려 해도 민족적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역사서술이다.


그러나 역사는 단호하다.

고구려가 침략을 받은 나라였고 대승리를 거두어 그로 인해 수나라가 멸망에 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7. 신라와의 균열


영양왕의 국경은 남쪽에서도 편치 않았다. 신라와 오랜 동맹은 신라가 당에 가까이 다가가며 흔들렸고, 602년에는 신라 진평왕과 전쟁까지 벌어졌다.

전선은 북과 남에 동시에 열렸다.

그럼에도 고구려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8. 맺음말


거대한 중국 수나라와 전쟁 속에서도 문화를 정리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국경을 넓히고 인재를 키워낸 왕이 '영양왕'이었다


이처럼 영양왕은 고구려 마지막 황금빛 구름을 만든 사람이다.


영양왕 손길 위에서 을지문덕 칼이 번쩍였고, 고구려는 다시 한번 거대한 파도를 넘어섰다.


다음 글에서는 수나라가 고구려로 칼을 겨눈 이유, 그리고 을지문덕 살수대첩을 더 깊게 정리하겠다.


— 초롱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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