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 편 1 -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연개소문’ 1)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7
ㅡ 삼국통일의 시대 22 ㅡ
(고구려 멸망 편 1 -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연개소문’ 1)
우리나라 역사에는 수많은 정변과 쿠데타가 존재해 왔다. 그중에는 실패한 시도도 있었고, 성공하여 체제를 바꾼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 쿠데타로 흔히 언급되는 사건은 고조선 시대 ‘위만의 정변’이다. 위만은 기원전 194년경 중국 연나라 출신으로 고조선에 망명한 뒤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이른바 '위만조선'을 세웠다. 다만 외부세력이 내부정권을 탈취한 사례이기에, 현대적 의미의 군사쿠데타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두 번째 쿠데타는 신라 '진지왕 폐위사건' (579년)이다. 진지왕(재위 576~579)은 방탕한 행실로 귀족들 반발을 샀고, 결국 화백회의를 중심으로 한 진골 귀족들 결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왕위는 그의 조카 '진평왕'에게 넘어갔다. 이 사건은 군사력이 아닌 귀족합의에 의해 왕권이 교체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정변의 성격을 띤다.
또한 바로 앞 편에서 다루었듯, 백제 '의자왕'의 친위쿠데타도 존재했다.
이 외에도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수많은 쿠데타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성공한 경우에는 이후 역사 기록 속에서 그 흔적이 지워지거나 다른 방식으로 미화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오늘 다룰 연개소문의 집권 과정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군사쿠데타로 평가된다. 기록상으로도 그리고 현대적 기준으로 보아도 군사 쿠데타 요건에 가장 부합하는 사건이다.
연개소문 쿠데타 이후에도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쿠데타가 이어졌지만, 대부분은 국가와 사회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남겼다.
좋은 혁명은 있을 수 있어도,
좋은 쿠데타는 없었다.
이제 연개소문 군사쿠데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앞선 ‘영류왕’ 편에서 정리했듯이, 고구려 27대 왕 영류왕은 수나라와 네 차례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대외전쟁을 피하고, 고구려 역사에서는 드문 평화의 시기를 만들었다. 당나라와 외교를 통해 재정비 시간을 벌고, 국가 재도약 발판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부정치 상황은 달랐다.
대당(對唐) 정책을 둘러싸고 '주전파'와 '화친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 최고 귀족가문 가운데 하나였던 연 씨 가문 인물, '연개소문'은 주전파 대표 인물이었다. 그는 당나라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해야 하며 군사적 대결을 통해 고구려 독립성과 자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개소문은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연태조'는 고구려 유력 귀족 직위인 '동부대인'을 지낸 인물로, 국가 정치와 군사에 깊숙이 관여했던 실력자였다.
현대적 표현으로 하자면 연개소문은 단순한 ‘금수저’를 넘어 왕족에 준하는 최상층 특권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사료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젊은 시절부터 성격이 거칠고 잔혹한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구당서'에는 그가 관직을 차지한 뒤 왕권을 위협하려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 연개소문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영류왕'은 642년 1월,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 감독이라는 명목의 임무를 맡겨 북부 국경지역으로 파견했다.
이는 연 씨 가문 정치적 영향력 약화시키고, 나아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왕과 관료층 정치적 계산이 담긴 조치였다.
그리고 곧, 그 우려는 현실이 된다.
연개소문 암살 계획은 조정내부에 포진해 있던 그의 측근들에 의해 누설되었고 연개소문은 이를 사전에 파악한다. 그는 방어가 아닌 선제공격, 즉 쿠데타를 선택한다.
642년 1월, 연개소문은 잔치를 구실로 대신들을 불러 모은 뒤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살해했다.
이어 궁궐로 진입해 영류왕을 시해하고, 왕의 동생 '고태양'의 아들 '고 보장'을 새 왕으로 옹립한다.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이다.
연개소문은 이후 스스로 막리지에 올라 실권을 장악한다.
이 장면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상황, 특히 12·12 쿠데타 전개과정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 해지고 군 지휘 체계를 넘어선다고 판단해, 그를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인사 조치에 대한 기밀이 전두환 측근 통해 사전에 유출되었고 전두환은 이를 위협으로 인식했다. 이에 전두환은 ‘생일잔치’라는 작전명으로 먼저 정승화를 기습적으로 체포· 공격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다.
이런 점에서 해당 장면은 권력 견제를 위한 정상적 조치가 사전에 노출되고, 그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무력행동이 촉발된다는 구조에서 12·12 사태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연개소문 쿠데타 과정은 당나라 사서인 '신당서'와 '구당서'에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그 원문과 번역한 내용이다.
[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 自云生水中以惑衆. 性忍暴. 父爲東部 大人·大對盧, 死, 蓋蘇文當嗣, 國人惡之, 不得立, 頓首謝衆, 請攝職, 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嗣位. 殘凶不道, 諸大臣與建武議誅之, 蓋蘇文覺, 悉召諸部, 紿云大閱兵, 列饌具請大臣臨視, 賓至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殺建武, 殘其尸投諸溝. 更立建武弟之子藏爲王, 自爲莫離支, 專國, 猶唐兵部尙書·中書令職云.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 씨이며, 자신이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개소문 아비인
동부대인이 죽자, 개소문이 당연히 이어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섭식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이 건무(영류왕)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알아차리고 제부(諸部)의 병(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들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의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 (莫離支)가 되어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나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ㅡ '신당서' 권 제220 '동이열전' 제145 ㅡ
'신당서'는 당나라 역사서인데 고구려 <군사쿠데타>에 대해 정말 자세히도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신당서> 모두 쿠데타 이후 연개소문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를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 개소문은 자신관복을 온통 금으로 장식했으며, 평소에도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고, 말을 타고 내릴 때는 장수를 받침 삼았다. 또한 연개소문이 행차를 할 때에는 호위병들로 하여금 엄중하게 대오를 이루어 다녔으며 길을 지날 때에는 행차를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는데 이럴 때면 길거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구덩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숨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도 거의 동일하게 전해진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구당서'와 '신당서'를 참고해 상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사서들이 연개소문에 관한 기록을 유난히 상세하게 남긴 것은 그만큼 당나라가 연개소문을 강력한 견제대상으로 인식하고 두려워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를 폭군이자 독재자로 규정하려는 정치적 의도 또한 엿볼 수 있다.
당나라가 연개소문을 두려워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집권한 시기에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침공(645년)해 '안시성전투'에서 패배하여 철수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연개소문은 중국경극에서 주연 악역으로 등장할 정도로 중국 민중에게도 두려움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역시 중국기록 참고했음이 분명한 만큼,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연개소문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 부분 중국 측 시각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윗 기록들이 조금 과장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후 상황을 살펴보면 연개소문 성질이 호락호락한 좋은 성격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연개소문 용모에 대해서는 조금 긍정적 표현도 있다.
[소문蘇文의 성姓은 천 씨泉氏이며,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고, 용모形體가 아주 걸출하였다. 몸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데,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
ㅡ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ㅡ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는 더 짧지만 의미심장한 평가가 덧붙어 있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용모부터 범상치 않고 카리스마가 넘쳤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당나라 시각에서는 연개소문이 당과 외교를 단절시키고 전면대결을 선택한 위험한 독재자였으나, 고구려 입장에서는 자주성과 독립을 끝까지 지켜낸 강력한 인물로 볼 수도 있다.
연개소문은 대외적으로 영웅으로 평가받을 여지는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대내적으로는 무자비한 독재자였고, 또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고구려 멸망을 재촉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다음 편에서 연개소문 이러한 양면성이 고구려 멸망에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를 상세히 살펴보겠다.
〈연개소문 2〉로 이어집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