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8

고구려 멸망 편 2 -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연개소문’ 2)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8

ㅡ 삼국통일의 시대 23 ㅡ

(고구려 멸망 편 2 -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연개소문’ 2)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크게 달랐다.


조선·고려 시대 유교적 관점에서 '영류왕'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을 '난신적자'라 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신채호, 박은식 민족주의 사학자 들은 중국이라는 강력한 외세를 물리치고 만주를 지켜낸 민족적 '걸웅'으로 재평가했다.


하지만 1930년대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신채호와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연개소문은 외세를 막아낸 걸웅이지만, 군사 쿠데타와 독재정치, 권력세습으로 전쟁만 일삼아 백성들을 고통 속에 빠뜨렸고, 고구려 멸망 원인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관점이 가장 합리적 이다. 역사적 인물은 업적과 한계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1. 고구려 백성과 역사의 시각


우리가 흔히 ‘고구려’하면 활기찬 전투민족만 떠올리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던 백성들 고통은 간과되기 쉽다. 연개소문 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연개소문은 외세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적 면모도 있지만, 영류왕을 살해한 군사쿠데타, 당과의 전쟁을 통한 권력유지, 신하와 백성에 대한 억압 등 독재정치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여기에 좀 더 덧붙여 정리하자면,

민중 관점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시기는 언제였을까?


나는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을 살며 힘든 사람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풍요롭고 안전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을 제외하면 어떤 시대가 가장 살기 좋았을까?


흔히 사람들은 <조선세종시대>를 떠올린다. 세종은 성군으로 칭송받는 임금이니, 그의 치세 아래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전문가들은 조금 다른 답을 내놓는다. 의외로 <연산군시대>가 조선백성이 가장 살기 좋은 시기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폭정을 저질렀지만, 그 화살은 주로 신하들에게 향했고, 백성들에게 전국적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종시대에는 자연재해가 잦고, 왜구침략과 북방개척을 위한 군사징발 등으로 백성들 삶이 상당히 고단했다. 반면 연산군 시기는 전쟁과 재해가 비교적 적어,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처럼 역사는 우리가 배우고 드라마로 접한 이미지와 달리 의외의 진실을 품고 있다.


임금이 성군이냐 폭군이냐만으로 백성의 삶을 판단할 수 없다는 점, 그것이 역사 공부의 매력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정복군주들을 대부분 위대한 영웅으로 우러러보지만 당시 민중들 입장에서는 가장 처참한 시기를 보냈을 것이다.


2. 연개소문 시대 주요 전투


연개소문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두 번의 큰 전투가 있었다.


1) 안시성 전투


안시성 전투에 대해서는 앞 편 에서 자세히 정리했으니 간략하게 연개소문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겠다.


일부 설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중앙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양만춘과 협력하여 방어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반면, 다른 설에서는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대립하여,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돕기는커녕 공격했다가 실패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 다른 설은 중앙정부와는 아무 관련 없이 안시성 성주가 스스로 방어에 성공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전투 결과, 당군은 철군했고 고구려 자주성과 연개소문 정권은 유지되었다.


2) 사수전투(662년)


<사수전투>는 안시성 전투나 살수대첩 등에 못지않는 전투였는데 우리에게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 이 전투가 있고 나서 6년 만에 고구려가 멸망해서 그럴 것이다.


'사수전투'는 연개소문이 지휘해 승리한 전투였다. 연개소문 고구려군이 당나라 '옥저도행군' '패강도행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였다.


당시 평양 근처에서 진행되었고, 당군 수뇌부 상당수를 전멸시키며 연개소문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삼국사절요' (조선세조 때 편찬 되어 성종 때 완성된 삼국흥망과 고려건국까지 다룬 편년체 역사서)에서는 <사수전투>에서 죽은 중국 장수 '방효태'군사만 수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방효태가 지휘하던 '옥저도행군' 규모는 '행군'이란 당 부대 편성이 최소 10,000명 이상인 건 분명한 사실이라 당군이 대군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패강도행군'의 '임이상'은 이 <사수전투> 에서 연개소문에 의해 척살당했다고도 전해지기도 한다.


사수전투 당시 신라 김유신장군이 보급품을 평양성을 공격 중이었던 당군에게 어렵게 전달했으나, 당군 장수 '소정방'은 평양성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해 버려 김유신을 분노케 했다. 이에 위기에 빠진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김유신 기지로 간신히 빠져 나왔으나 고구려군이 끝까지 추격하지 못한 것은 후일 고구려 멸망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


고구려는 '사수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전쟁과 내정혼란은 고구려를 쇠퇴하게 했다.


3. '사수전투' 이후 당나라 전략 변화


'사수전투' 패배는 당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 중심부에 대한 전면적 침공을 포기하고, 요동·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국지전 전략으로 전환했다.


고구려 주요 성과 도시를 직접 공격하기 보다는, 고구려 백성을 괴롭히고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적은 병력으로 자주 침략하는 전략을 펼친 것이다. 고구려는 당군이 소수병력이지만 침략할 때마다 고구려 특유 청야전술 (집과 논. 밭을 불태우고 산성으로 들어가는 것)과 산성방어 위주의 회피전략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 백성들은 농사와 생업에 어려움을 크게 겪으면서 전쟁에만 몰두하는 연개소문 정권에 점차 불만이 쌓였다. 이 불만들이 고구려 멸망에 직접적 원인이 된다.


결국 연개소문 정권은 사수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 내부혼란과 외세 국지전 전략이 겹치면서 고구려를 점점 쇠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4. 연개소문 사후와 고구려 운명


666년 연개소문 사망 이후, 그의 아들들에 의한 치명적인 내전이 발생했다. 이 틈을 당과 신라가 놓치지 않고 고구려를 압박했다. 사수전투라는 대승에도 불구하고, 내부분열과 외부압력은 고구려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


5. 결론


연개소문은 외세를 물리친 영웅이자, 동시에 쿠데타와 독재 그리고 전쟁으로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린 권력자였다.


'안시성전투'와 '사수전투' 같은 군사적 승리는 그의 전략과 고구려 군사력의 위력을 보여주지만, 당시 백성들 삶과 국가의 장기적 안정을 고려하면 비판적 평가 또한 필요하다.


역사는 단순히 영웅과 폭군으로 나뉘지 않는다. 인물과 사건의 업적과 한계를 함께 살펴야 비로소 균형 잡힌 이해가 가능하다.


이어서 고구려 내분과 멸망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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