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 편 3 -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 내분 1)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9
ㅡ 삼국통일의 시대 24 ㅡ
(고구려 멸망 편 3 -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 내분 1)
'연개소문'은 666년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나이는 약 61~63세로 추정된다. 출생연도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603~605년경으로 보고 있다. 고대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장수한 편에 속한다.
연개소문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자연사설, 암살설, 전투 중 부상설, 질병설> 등 여러 견해가 존재하지만, 이를 명확히 입증할 사료는 없다. 현재로서는 '자연사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연개소문이 사망한 뒤 불과 2년 만에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662년 '사수전투'에서 당나라 군을 크게 격파했던 고구려가, 불과 몇 년 만에 무너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600년 넘게 존속한 국가의 멸망을 단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고구려 멸망은 <내부 귀족세력 분열, 지도층 내부 권력투쟁, 신라·당 연합군 침략>이라는 내부 분열과 외부 강력한 압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연개소문 사후 발생한 권력공백과 그로 인한 내부 내란이다.
특히 연개소문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은, 고구려 멸망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1.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 권력 다툼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세 아들인 <연남생·연남건·연남산>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시작된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연개소문이 자식 농사를 잘못 지어 고구려를 망하게 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료를 살펴보면, 형제간 우애 자체가 특별히 나빴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맏아들 '연남생'은 두 동생에게 수도 '평양성'을 맡기고 지방순시를 떠날 정도로 그들을 신뢰했다. 두 동생 역시 초기에 “형이 자신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주변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문제는 형제 사이가 아니라, 그 틈을 파고든 귀족세력이었다.
2. 고구려 말기 구조적 문제와 고구려 멸망에 대한 연개소문 책임에 관한 공방
고구려는 본래 '국내성'(현 중국 지린성 지안시)을 수도로 삼았으나, 427년 장수왕 때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이 수도 이전은 고구려 정치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ㅡ 국내성 귀족: 전통적 지배세력, 보수적 성향
ㅡ 평양성 귀족: 신흥세력, 수도 이전과 함께 정치·경제적 이익 확보
이로 인해 양 세력 간의 이해관계 충돌이 심화되었고, 이는 고구려 말기까지 이어지는 고질적인 내부 갈등으로 남았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 독립성이 강해지면서, 국가운영은 점점 불안정해졌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 극에 달한 고구려에서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강력한 군사독재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귀족세력 분열을 강제로 봉합했다.
이 체제는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발휘하여 내부갈등을 억제하고 당과 전쟁을 주도할 수 있는 추진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만을 들어 연개소문을 고구려 ‘구원자’로 평가하거나 민족기개를 살린 영웅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편화된 역사해석이다.
연개소문 통치는 근본적 제도개혁 아닌 개인권력에 의존한 독재억압 체제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기존 권력구조 무력화 시키고, 고구려 군사권을 총괄하던 ‘막리지’ 직위를 스스로 '태막리지’로 격상시켰다.
이는 단순한 직함변경이 아니라, 국정운영 균형을 개인에게 집중시키는 권력구조 파괴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직위를 종신직으로 만들고, 자녀에게 세습되는 자리로 고착시킴으로써 고구려를 사실상 사유화했다.
문제는 이 독재체제가 연개소문 가문과 개인생존을 전제로만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생전에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공포정치가 귀족갈등을 억누를 수 있었지만, 그의 사망과 동시에 그 억제장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권력은 세 아들 사이에서 분열되었고, 독재체제 아래에서 축적된 내부모순은 한꺼번에 폭발했다.
결국 연개소문 체제는 고구려를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가 아니라,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만 작동하는 권력장치였다.
따라서 고구려멸망 책임을 외세 침략이나 후계자 무능으로만 돌리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일이며, 멸망 단초는 연개소문 스스로가 구축한 군사독재체제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연개소문을 당의 침략을 두 차례나 격퇴한 불세출 민족영웅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앞선 주장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제기한다.
이들에 따르면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결과론적 패배주의 시각에 치우친 것으로, 당시 고구려가 처한 국제정세와 현실을 간과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7세기 동아시아에서 당은 압도적 군사력과 자원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던 초강대국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온건한 외교나 내부합의 중심 정치로는 대응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이다. 즉, 연개소문의 강경한 집권방식과 철권통치는 개인적 권력욕 발현이라기보다, 국가존망 걸린 비상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선택된 전시체제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정변과 권력집중이 없었다면 고구려 조정은 친다 세력과 보수 귀족층 분열로 인해 더 조기에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연개소문 사후 내부 권력투쟁이 격화되자 고구려는 급속히 무너졌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고 본다.
이는 고구려 멸망원인을 연개소문 개인에게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부재에서 찾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연개소문을 고구려 멸망 책임자로 규정하는 시각은, 그가 생전에 수행한 결정적 방어전과 국가보존 공적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는 평가라고 본다.
다시 말해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쇠퇴로 이끈 인물이 아니라, 이미 몰락의 길로 접어든 국가를 마지막까지 지탱해 낸 최후의 버팀목이었다는 것이 이들의 핵심 주장이다.
3. 연남생과 귀족세력 충돌
연개소문의 뒤를 이은 맏아들 '연남생'은 '태막리지'에 올라 국정을 장악한 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중앙집권 강화를 추진했다. 이는 지방분권을 선호하던 귀족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정책이었다.
귀족들은 직접 연남생과 대립하기보다는, 그의 두 동생을 이용해 내부갈등을 유도하는 전략을 택했다.
연남생이 중앙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 여러 성을 순시하러 떠나자, 귀족들은 평양성에 남아 있던 '연남건'·'연남산'에게 접근해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연남생은 결국 두 분을 제거할 것이다. 당하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 한다.”
초기에는 이를 믿지 않았던
두 동생 역시, 반복되는 이간질 속에서 점차 의심을 품게 된다. 한편 연남생 또한 “동생들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지속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결국 밀정을 보내 동향을 살피게 한다.
그러나 이 밀정이 발각되면서 형제간 불신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게 된다.
4. 정변과 내전의 시작
연남건과 연남산은 왕명을 빙자해 연남생을 평양성으로 불러들이려 했으나, 연남생은 자신이 제거될 것이라 판단해 귀환을 거부한다.
결국 666년, 두 동생은 정변을 일으켜 평양성을 장악했고, 연남생 아들 '연헌충'마저 살해한다.
이게 결정적 실수였다.
이후 연남건은 스스로 태막리지를 칭하고 군사를 보내 지방의 연남생 세력을 토벌하려 한다.
이에 연남생은 옛 수도인 국내성으로 피신해 방어에 나서는 한편, 또 다른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지원을 요청한다.
5. 연남생 최악의 선택
이 시점에서 중요한 점은, 연남생이 처음부터 당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끝까지 망설였으나 형제를 잃은 아들 '연헌성'이 강력하게 주장하며 스스로 당으로 가겠다고 나섰고 연남생은 결국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연헌충을 살해한 것이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이었다.
이 최악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고구려 멸망을 앞당긴 결정적 계기가 된다.
당시 당나라와 신라는 모두 당장 고구려를 재침 공할 여력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 최고 권력자 투항은, 당나라 입장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말 그대로, 연남생은 당나라에게 호박을 덩굴째 안겨준 셈이었다.
이후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가겠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