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 편 4 - 민족반역 매국노들)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0
ㅡ 삼국통일의 시대 25 ㅡ
(고구려 멸망 편 4 - 민족반역 매국노들)
오늘 내가 꺼낼 이야기는 무겁다. 민족의 역사 앞에서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짓눌리는 듯하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해서 역사를 덮어둘 수는 없다. 역사 속 배신과 선택의 결과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 전체에 오래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역사는 결코 흑백으로 단정할 수 없다. 내가 전하는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당시 상황은 복잡했고, 선택의 여지 또한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선택이 정의에 가까웠는지, 어떤 행위가 결코 용납될 수 없는지를.
판단을 미루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전혀 다르다.
역사를 마주하는 일은 책임과 선택을 직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 글에는 내 주관적 감정이 깊이 담겨 있음을 먼저 밝힌다. 하지만 그 감정조차 역사를 마주하는 최소한 성실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1. 배신과 역사적 평가
<예식진, 연남생, 이완용>
이 세 인물 공통점은 무엇일까?
생전에는 권력과 부를 모두 누렸고, 자손 대대로 그 부귀가 이어졌다.
역사적 평가는 모두 <민족반역 매국노> 오명으로 남았다.
그러나 현대 평가 온도차는 크다. 예를 들어, 근대인물인 '이완용'은 <민족반역매국노>라는 평가를 혼자 짊어진 반면, '예식진'은 거의 잊혔다.
'예식진'에 대한 사료는 극히 드물어 그간 역사 속에서 잊힌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예식진의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그가 당나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그가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나라에 인도한 공적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최근까지 <민족반역 매국노>로 '연남생'을 1호로 쳐 왔던 것이다.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거 죄와 부정을 잊어도 되는가?
오늘 글 핵심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2. 예식진과 연남생, 개인 선택이 국가를 무너뜨리다
백제가 마지막 숨을 고르던 순간, '예식진'은 군을 재정비해 반격을 준비하려고 자기 성으로 옮겨온 의자왕을 직접 붙잡아 당나라에 넘겼다. 이 선택으로 그는 당나라 귀족이 되었고, 자손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렸다.
개인적 인생 속 사주팔자로만 놓고 보면 완벽한 성공사례였다.
그리고 불과 8년 뒤, 고구려에서 비슷한 장면이 벌어진다.
연개소문 장남 '연남생'이
그 주인공이다.
연개소문 사후, 연남생은 태막리지로 취임했으나 동생들과 내분 속에서 고립된다.
그는 666년 당나라로 투항하며 국내성과 여섯 개 성, 세 성의 백성까지 이끌고 나간다. 당고종은 그를 <요동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 현도군공>으로 봉하고, 고구려 침략 원정군 향도로 삼는다.
결과는 참담했다.
700년을 버텨 온 고구려는, 단 한 사람 매국으로 불과 2년 만에 무너졌다. 수ㆍ당이 수십만 대군도, 수십 년 전쟁도 해내지 못한 일을 연남생이 달성한 셈이다.
3. 개인적 이해와 국가적 책임
연남생 선택에는 개인적으로만 보자면 동정 여지가 있다.
그는 연개소문 장남이자 정식 후계자였다. 국내 귀족들과 내분 속에서 연남생 장남이 동생들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최고권력자로서 그는 개인 안전보다 국가를 지키는 책임이 우선이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고구려를 버리고 자신과 가족안위를 선택했다.
이에 '삼국사기' 김부식은 명확히 평가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나라에서 명성을 얻었으나, 본국에서 말하자면 반인자라는 이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ㅡ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 ㅡ
역사는 결과로 평가된다.
예식진은 부귀영화를 누렸고, 백제는 사라졌다.
연남생은 당나라 귀족이 되었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이완용은 호의호식했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권력자는 살아남았지만, 국가는 죽었다.
고구려는 외적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의 선택에 패배했다.
4. 당나라 전략
당나라 당시 전략은 적국의 핵심 인물을 귀순시키거나 망명하게 만들어 내부를 붕괴시킬 수 있다면, 막대한 군사·재정적 소모 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귀순자에게 후한 작위와 대우를 보장한 것은 당나라의 일관된 전략이었다.
백제멸망 시 일등공신이 된 백제귀족 예식진을 당나라 귀족으로 만들어 가문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한 것도 이런 전략의 일종이었다.
수나라가 백만 대군으로도 무너뜨리지 못해 결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나라,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출병하고 굴복시키지 못했던 나라,
'사수전투'에서 당나라를 패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나라가 바로 고구려였다.
그 고구려가 단 한 사람 매국으로 급속히 붕괴되었으니, 당나라 입장에서 연남생은 ‘은인 중의 은인’이었을 것이다.
예식진 사례는 연남생에게도 분명히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불과 8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연남생이 당나라로 망명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예식진 전례는 강력한 참고 사례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나라 전략이 먹혀든 것이다.
이들은 사후에도 당나라에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연남생의 경우, 1924년에 발굴된 묘비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안동도호부 책임자로 재직하던 중 46세로 사망하자, 당 고종은 황실 악단으로 하여금 곡을 연주하게 했고, 황실 호위대가 관을 호송했으며, 3일간 조정업무를 중단했다. 발인 날에는 5품 이상 관리들이 모두 그의 집으로 찾아가 애도했는데, 그 성대함이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연남생에게 내려진 시호 ‘양공(襄公)’, 즉 ‘도와준 공작’이라는 호칭은 그가 당나라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 민족 입장에서 이는 참담한 역사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은 단발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상대 국가만 달라졌을 뿐, 개인과 가문의 안위를 위해 나라를 파는 행태는 반복되어 왔다.
1000년이 훨씬 지나서 구한말 때 당전략을 일본이 써먹는다.
이완용 등 을사오적 역시 결코 돌연변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5.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같은 변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나라를 팔아먹은 민족 반역 매국노들은 당시 민중 앞에서는 선량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한, 당시 지배층 엘리트들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판세는 끝났다.”
“이 정도 피해로 막은 게 최선이다.”
“살아남아야 다시 도모할 수 있다.”
예식진도 그랬고, 연남생도 그랬으며, 이완용도 똑같은 논리를 폈다.
이처럼 최고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 하나가 역사를 바꾼다.
이유를 막론하고, 한 나라 최고 지도자의 선택은 그만큼 무겁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이 교훈은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논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논리로 국민을 기만하는 자들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그리고 후세들은 역사 속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개인의 안위를 위해 국가를 버린 자들과,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자들,
이 두 세력의 대립 속에서 말이다.
오늘은 고구려 멸망 원인을 '연남생'에게서만 찾았지만 다음 편에서는 고구려 멸망 진짜 이유들을 더 상세히 살펴볼,
〈고구려 멸망 마지막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