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 편 5 - 마지막 편)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1
ㅡ 삼국통일의 시대 26 ㅡ
(고구려 멸망 편 5 - 마지막 편)
700년 간 존속했던 고구려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제 글에서 고구려 최고권력자였던 '연남생' 선택이 결정적 계기였음을 언급했지만, 고구려 멸망, 결코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고구려는 외부압박과 내부균열이 동시에 누적된 결과로 멸망했다.
1. 대외적 요인 ― 수ㆍ당 지속된 압박과 국제정세 변화
고구려는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왕조의 집중적 공격을 받아왔다.
수나라 대규모 침공은 '살수대첩' 등으로 격퇴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모된 국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뒤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수나라 보다 훨씬 정교한 군사체계와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압박했다.
당태종 침공을 '안시성전투'와 '사수전투' 승리로 막아냈지만, 고구려 부담은 점점 누적되었다.
결정적 변화는 '신라의 당과 동맹'이었다.(나당동맹)
백제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는 당과 손을 잡았고,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남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받는 구조적 불리함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북방에서 완충역할 하던 '돌궐'세력 붕괴로 인해 고구려는 당나라 직접적인 군사 압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내부적 요인 ― 귀족들 권력분열과 국력고갈
고구려 멸망을 외부공격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보다 치명적인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했다.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귀족세력은 급속히 분열되었고, 연개소문 아들들 사이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가통합력은 붕괴되었고, 마침내 연개소문 장남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군사기밀과 내부사정이 적에게 넘어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처럼 귀족분열과 왕권약화는 국가 전체를 하나로 묶는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시켰다.
또한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은 고구려 국력을 서서히 잠식했다.
지속적인 병력동원과 세금부담은 백성들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농업생산력 역시 크게 저하되었다.
고구려가 겉으로는 여전히 강대국처럼 보였지만, 고구려는 이미 내부적으로는 곪아 터져가고 있었고, 버틸 힘을 상당 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3. 신라의 미묘한 입장 ― 적극 개입이 아니었던 이유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당나라와 신라 모두 고구려를 즉각적으로 대규모 공격할 여력이 충분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곪아터져 가고 있었지만, 당나라 사정은 앞선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고,
신라 역시 백제부흥운동을 정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던 시기였다.
또한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 공격과 함께 신라에 대한 정벌 의도까지 노골적으로 드러 내자, 김유신을 중심으로 신라는 당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신라는 666년 4월, 형식적으로 당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한다.
이 당시 당은 662년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가 '사수전투'에서 대패하고 고구려 침공 의지를 정말 포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당나라에 병사를 요청하였다.]
― '삼국사기' 문무왕 편 ㅡ
그러나 이는 신라 실질적 의도라기보다 신라의 외교적 제스처에 가까웠다. 백제멸망 이후 고구려는 당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서 일정한 전략적 효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당이 고구려를 쉽게 침공할 수 없는
당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반응을 가늠하기 위해 당을
한 번 떠본 것이었다.
4. 연남생 망명과 전세 급변
그러던 중, 신라 예상과는 달리 고구려가 내분으로 연남생이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의 기류가 확 바뀌고, 당과 함께 연남생이 직접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로 인해 전쟁양상은 급변했다.
당의 급작스러운 고구려 침공에 신라는 당황했고, 666년부터 668년 초까지는 고구려 원정에 적극적 개입하지 않은 채 귀순한 고구려 유민만을 받아들이며 상황을 관망한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고구려 부흥 군 장수 '검모잠'과 신라 '문무왕' 사이 문서에서 신라는 고구려인을 울타리로 삼으려는 의도까지 드러낸다.
5. 신라의 합류 ― 막차에 오른 이유
668년 6월, 고구려 패색이 짙어지자 당고종은 신라에 공식적으로 합류를 요청한다.
당은 고구려의 마지막 반격을 두려워했고, 이번만큼은 전쟁을 확실히 끝내기 위해 신라 참여를 필요로 했다.
이 요청은 신라에게 울고 싶을 때 당이 뺨을 때려 준 신라에게는 절묘한 기회가 되었다.
고구려 멸망이 기정사실화되는 상황에서 신라는 전후처리에 대한 발언권과 명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나당동맹' 명분과 지분을 요구하기 위해 대군을 준비하여 평양성에 막차 타러 간다.
당시 신라가 고구려에 대군을 보낸 속마음은 고구려 멸망한 후에 고구려 부흥 군을 지원하며 당을 견제하려고 하였던 것이었다.
이 점만 보아도 666년 신라가 당에게 고구려를 치자며 당군을 요청한 것은 보여주기식 몸짓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 외교능력이나 국제정세 판단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당고종에 의한 신라합류 요청은 우리 민족에게는 그나마 천만다행한 일이 되었다.
신라가 고구려 땅이었던 한반도 북부를 조금이나마 차지하게 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합류요청 없이 신라가 고구려 멸망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면 고구려 땅은 모두 당나라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 멸망 후 '나당전쟁' 벌일 명분도 없었을 것이다.
당의 합류요청에 따라 신라는 668년 6월 21일,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김인문, 김흠순, 김천존, 김문충, 김진복, 김지경, 김양도, 김개원, 김흠돌을 대당총관>으로 하는 등 신라군 주축 병력을 총집결시켜 신라 서북부 '한성'에서 출진해 '평양'으로 진격한다.
이때 신라군 병력이 무려 20만 명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병한 신라군이 20만이라는 점은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에 나와있는데, 그동안 보여왔던 신라국력으로는 도저히 무리인 대군이다. 당장 660년 '황산벌 전투' 5만이 국경지대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신라 전국에서 모은 병력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660년 이후로 백제유민도 흡수했다. 또 666년 12월, 고구려 형제간 내란에 분통이 터진 연개소문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고구려 12 성과 수천 명 백성을 통째로 바치며 항복해 왔다.
이처럼 연정토가 바친 남부 고구려 땅과 백성도 흡수한 데다 후방위협(백제, 일본)도 사라져서 후방 걱정 없이 신라가 뽑아낼 수 있는 전국 각 주 병력을 모았으면 황산벌 시절보다 많아졌을 개연성은 있다.
그렇다 해도 20만은 너무 많다.
상당히 과장된 기록으로 보인다.
어쨌든 신라가 본격적으로 출진한 시점에 고구려 남부 국경방어선은 뻥 뚫려 있었다. 신라는 별 저항도 안 받고 평양성까지 진격한다.
6. 고구려의 최후 ― 평양성 함락
고구려는 당과 압도적인 전력차이 났음에도 2년에 걸쳐 끝까지 대사투를 벌였다. 고구려 저력은 여전했다.
하지만 막판에 신라까지 합류한 '나당연합군'은 막아낼 수 없었다
668년 말, 평양성은 결국 함락된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승려 '신성'이 당군과 내통해 성문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 시점 이전에 고구려 '보장왕'이 이미 당 장수 '이적' 에게 항복한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성 행동이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는 신성이 이미 내려진 보장왕 항복명령을 따른 결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끝까지 항전을 주장했던 '연남건'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보장왕과 함께 포로가 되면서 평양성은 완전히 함락되었다.
이로써 700년을 이어온 고구려는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만주벌판을 누비던 고구려 기상은 이제 우리 민족 기억과 꿈속에만 남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나당전쟁' 편으로 이어집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