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2

민족'이라는 개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2

ㅡ 삼국통일의 시대 27 ㅡ

(번외 편- '민족'이라는 개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나당전쟁'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바로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사용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다.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는 늘 이런 전제가 깔려 있다.


“신라는 같은 민족인 고구려·백제 상대로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멸망시켰다.”


그래서 통일은 불완전했고,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만주벌판은 지금도 우리 민족 땅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항상 뒤따른다.


그러나 이 질문부터 다시 던져야 한다.


과연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 사람들에게 ‘동일민족’이라는 인식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었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삼국은 정치·군사적으로 치열한 경쟁관계였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적이 되었다. 그 선택 기준은 동족의식이 아니라 철저히 국가적 이해관계였다.


물론 삼국이 완전히 이질적 집단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조선·부여로 이어지는 역사적 계승, 언어와 문화 유사성, 혼인 동맹과 일시적 협력관계는 분명 존재했다.


외부세력인 '중국'이나 '왜'와 구별되는 문화적 동질성 또한 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혈통중심 ‘한민족’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이러한 혈통중심 단일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인식이다.


사실 '민족'이라는 단어 자체도 근대 산물이다.


1871년 일본에서 서구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처음 '민족'이란 단어가 만들어졌고, 유럽에서도 '민족국가' 등장은 18세기 이후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갑오경장 이후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민족’, ‘단군 자손’, ‘오천 년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이 강조된 것은

식민지지배에 맞선 저항논리였고, 그 유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 이전 사람들은 자신을 민족이 아니라 왕조와 국가, 신분과 씨족, 지역공동체로 인식했다.


특히 지배층들이 더욱 그랬다.


고구려인은 고구려인이었고, 고려인은 고려인이었으며,

조선인은 조선인이었다.


그리고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했다. 즉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같은 혈통 ‘민족’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피지배층은 자기들과 다른 개ㆍ돼지로만 인식했다.


지배층은 중국귀족 혈통이나 명문가 출신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더 중요한 정체성이었다.


우리나라 성씨가 중국에서 많이 따온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사대주의가 형성되었고, 나라가 멸망해도 자신 지배적 지위만 유지된다면 상관없다는 태도가 반복되었다.


예식진, 연남생, 이완용 등이 그러한 대표적 예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우리가 비난하는 역사 속 인물들,

그리고 지금의 지배층 역시 같은 구조 속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 속 지배층들이 민족을 부르짖는 말은 앞에 서 있었지만, 그 뒤에는 늘 개인과 가문 번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현명한 백성,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지배층> 모습은 지배층들 모순된 사고방식이 남긴 오래된 흔적이다.


그들은 국가나 민족보다 권력과 가문의 존속을 더 중시한다.

‘친일’, ‘친미’, ‘친중’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어떠한가?


외세를 끌어들인 배신 역사로만 규정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신라 선택은 지배층이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을 가능성 크다.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이는 행위 역시 민족적 관점보다는 현실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선택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족적 부끄러움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이후 당이 신라마저 직접 지배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하자, 신라는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백제 유민들 군사적· 사회적 협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점차 일정 수준 민족적 동질성이 형성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 역시 고대사를 서술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같은 민족의 역사’라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 논란도 우리 민족이‘수천, 수만 년 이어온 단일민족’이라는 가정 위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같은 민족이 되었는가?


그리고 민족이라는 틀에 갇힌 역사인식은 과연 유효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내려놓는 순간

지배층 기회주의와 권력추종을 비판할 언어 또한 사라진다.


오늘은 그 모순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다시 <초롱초롱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다음 편은 '나당전쟁'이다.


어쩌면 '나당전쟁'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민족개념과는 다를지라도, 이 땅에 함께 살아간다는 공동소속감이 처음으로 형성된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역사학자들은 고려시대에 거란과 세 차례 전쟁을 거치며,

오늘날과 유사한 민족적 동일성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어서. 나당전쟁 편이 계속됩니다.


― 초롱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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