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2

남북국 시대 3 ㅡ발해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2

ㅡ 남북국 시대 3 ㅡ

(발해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 우거왕 때 멸망하였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은 약 2천 년 이상, 혹은 3천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존속한 국가가 된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장수 왕조에 해당한다.


그러나 고조선이 실재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의 이름은 <단군왕검, 기자, 위만, 준왕, 우거왕>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에 비해 남아 있는 정보는 너무나 제한적이며, 그 대부분의 역사는 사실상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 점은 역사에서 ‘기록’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가가 오래 존속했다고 해서 그 역사가 자동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며, 체계적인 기록이 남지 않으면 기억에서 쉽게 사라진다.


이와 같은 문제는 '발해'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발해'는 불과 천 년 전 국가이고, 약 200년 동안 존속한 대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사료가 매우 부족하다. 그 결과 발해 정치· 사회·문화에 대해 우리가 아는 내용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발해보다 훨씬 오래된 삼국시대의 국가들—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정보가 전해진다. 이는 이들 국가 역사가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다양한 기록 속에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 국가 역사적 실체와 그 인식 깊이는 존속 기간보다도 얼마나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가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고조선과 발해 사례는 기록부재가 곧 역사 인식 한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발해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건국시조부터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이처럼 엇갈린 기록 속에서 우리는 발해건국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사료의 틈에서 다시 보는 발해 건국 순간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668년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역사가 그와 함께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멸망 이후에도 고구려유민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정치적 재결집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난 결과가 바로 발해건국이다.


698년, 고구려유민 출신 지도자 '대조영'은 옛 고구려 영토였던 '동모산' 일대, 오늘날 중국 지린성 둔화현에서 새로운 나라 세웠다. 이때의 국호는 ‘발해’가 아니라 '진국'(震國) 이었다. 발해라는 국호는 713년,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면서 공식화되었다. 이는 발해가 국제질서 속에서 외교적 실체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발해'라는 국호는 외교무대에서 선택한 명칭이다. 당나라와 관계에서는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했지만, 일본과 외교에서는 스스로를 ‘고려’라 칭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신생국가가 아니라 고구려 계승국가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대조영과 걸걸중상, 누가 발해 건국시조인가?


발해건국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 건국시조에 대한 문제다.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 (대중상) 역할은 사료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1) '구당서' 동이열전은 걸걸중상을 중심인물로 묘사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걸걸중상은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지도자였다. 대조영은 아버지와 함께 활동한 인물로 등장하며, 발해건국 역시 이 집단이 동모산으로 이동한 이후의 결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2) '신당서' 동이열전은 대조영 중심 서술을 취한다. 여기에는 걸걸중상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대조영이 당의 추격을 피해 동모산에 정착하고 스스로 나라를 세운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오늘날 교과서와 일반적인 발해건국 설명은 이 '신당서'의 서술을 기준으로 한다.


이러한 사료 차이는 학계 해석을 갈라놓았다. 일부 학자들은 '구당서'와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을 근거로 발해건국 시점을 678년으로 보기도 하며, 건국 주체를 대조영이 아닌 걸걸중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소수설에 해당하며 현재 학계 주류는 여전히 698년 대조영 건국설이다.


3. 혼란 속에 만들어진 나라 발해


발해건국 과정은 계획된 국가

건설이라기보다는, 혼란 속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선택의 결과에 가까웠다.


668년 고구려멸망 이후, 대조영과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의 '영주', 오늘날 랴오닝성 차오양 일대로 이송되었다. 이 시기부터 이들은 고구려유민 사회 지도자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전환점은 695년에 찾아온다. 거란족 지도자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당나라 통치질서가 흔들렸다. 이 혼란을 틈타 '걸걸중상'과 말갈족 지도자 '걸사비우'는 세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당나라 장수 '이해고'가 이들을 추격했지만, 끝내 제압하지는 못했다.


이동 과정에서 걸걸중상은 병으로 사망했고, 지도력은 아들 대조영 에게 넘어갔다. 이후 대조영은 '천문령전투'에서 당나라 추격군 격파하며 독자적 세력의 생존을 확정 지었다. 이 승리는 단순한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국가건설로 나아갈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의 확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698년, 대조영은 동모산에서 '진국' 건국을 선포한다.


4.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 남아 있는 질문


발해사는 무엇보다 사료부족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발해 자체 기록이 소실되었고, 조선 이전의 역사 서술이 신라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발해건국 세부과정은 온전히 복원되지 못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걸걸중상이 발해 추존왕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관련 사료 부족이나 후대 사서 선택적 서술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발해가 698년이 아니라, 678년에 대조영 부친인 걸걸중상에 의해 이미 건국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일부 존재한다. 더 나아가 걸걸중상과 대조영을 부자관계가 아닌 동일인물로 해석하는 주장 역시 학계 극소수 의견으로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의 주류 견해는 발해가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것이며, 우리나라 역사교육 역시 이러한 주류학설을 따르고 있다.


5. 고구려 이후의 고구려인 발해


발해는 고구려 멸망 약 30년 만에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이 다시 결집하여 세운 독립국가였다. 초기에는 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이후 발해라는 국호로 국제질서 속에 편입되었다.


건국연대와 주체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현재로서는 698년 대조영 건국설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시에 초기 건국 과정에서 걸걸중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발해건국은 단순한 왕조 시작이 아니라, 고구려라는 역사적 정체성이 새로운 형태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사료 공백 속에서도 이 사실만큼 분명하다.


ㅡ 초롱박철홍 ㅡ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719)의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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