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1

남북국 시대 2 ㅡ 발해를 꿈꾸며 2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1

ㅡ 남북국 시대 2 ㅡ

(발해를 꿈꾸며 2)


먼저 어제 올린 글에 발해멸망과 백두산 대분화가 역사적으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다만 이를 다시 분명히 하자면,

발해 멸망(926년)과 백두산 대분화(946년)는 약 20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했으며,

발해멸망 당시 백두산 화산 활동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사료나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두 사건을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단정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백두산 대분화 전후 만주 및 동북아 일대가 기후변화와 환경적 격변을 겪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장기적 환경변화가 발해 사회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간접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한 뒤,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1. ‘발해(渤海)’라는 국호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발해(渤海)’라는 명칭은 문자 그대로는 넓고 큰 바다를 의미한다. 발해는 동쪽으로 동해,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발해만과 인접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해상교역과 외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이 국호가 발해 스스로의 ‘해양 정체성’을 직접 반영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당나라가 동북 변경지역을 지칭하던 지명인식과 명명관행 속에서 ‘발해’라는 명칭이 정착되었을 가능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보다 신중한 해석이다.


실제로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이 국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초기 국호는 ‘진국(震國)’이었으며, 이는 고구려 유민 국가임을 강조하려는 명칭으로 이해된다.


이후 국호를 ‘발해’로 개칭하면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유지하되 새로운 국가로서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2. 왜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이 지점에서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긴다.


“발해는 왜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하지 않았을까?”


현재 학계의 다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나, 고구려 단순한 부활을 목표로 한 국가가 아니었으며, 고구려유민과 말갈세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다민족 국가로 발전했기 때문에

‘후고구려’라는 국호 대신 ‘발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2) 당나라와 신라의 압박설


일부 학설은 발해가 ‘고구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 데에

당나라와 신라의 외교적·정치적 압박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자국의 행정체계 안에 편입시켰다고 인식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해가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할 경우, 이는 당나라 입장에서 고구려 부활을 주장하는 정치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었다.


신라 역시 삼국통일을 내세우며 고구려 옛 영토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발해가 ‘고구려’ 국호를 사용할 경우 자신들 통일정당성이 흔들릴 가능성을 의식했을 수 있다.


실제로 발해는 외교문서에서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예로 표현했으며, '속일본기'에는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국을 ‘고려’로 칭한 기록이 확인된다.


이는 대외적으로는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도, 내부적 정체성이나 특정 외교상황에서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드러낸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당과 신라가 발해의 국호 사용을 직접적으로 제한했다는 명확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압박설은 가능성 있는 해석이지만, 어디까지나 후대의 추론적 가설에 머문다.


3. 발해에 대한 당 사서의 시각과 그 한계


'구당서'와 '신당서'등 당나라 사서에서는 발해를

‘속말말갈(粟末靺鞨)’ 계통 국가로 서술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이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서 안에서도 “발해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발해가 고구려 계승 국가임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4.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가임을 보여주는 근거들


1) 사서기록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한중 사서 모두 발해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2) 왕실의 정통성


발해 왕실은 대조영을 비롯해 고구려 귀족 출신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3) 문화와 제도


발해의 행정체계, 불교문화, 건축 양식은 고구려의 전통을 강하게 계승했다. 수도 '상경용천부'의 도시구조 역시 고구려 평양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4) 민족 구성과 언어


발해는 고구려유민과 말갈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지배층은 주로 고구려계가 차지했다.

언어 또한 고구려계통과 연속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 고구려와 차이점, 그리고 발해 독자성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지만, 동일한 국가는 아니었다.


고구려의 중심이 압록강·대동강 유역이었다면, 발해는 동북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영토 역시 최대 판도 기준으로는 고구려보다 넓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한반도 내 옛 고구려 핵심 지역 상당 부분은 신라 지배 아래 있었다.


발해는 고구려 부활보다는,

당나라와 외교 속에서 새로운 국가로 인정받는 것을 현실적 목표로 삼았다.


또한 발해는 고구려·말갈계뿐 아니라 주변 여러 북방집단과 교류하며 다민족국가로 발전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발해 문화는 고구려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나라와 북방문화 영향을 흡수해 독자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6. 오늘날 발해를 둘러싼 시각


오늘날 한국과 일본은 발해를 한민족 계통 국가로 인식한다.

반면 중국은 동북공정 이전부터 발해를 자국 역사 범주 안에서 해석해 왔으며, 러시아는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발해는 고구려와 함께

동북아 역사 인식 갈등의 핵심 대상이 되고 있다.


발해는 단순히 ‘꿈꾸는 역사’가 아니라, 사료와 연구를 통해 분명히 정립해야 할 우리의 역사다.


끝으로, 발해 건국시조가 대조영 아니라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 (대중상)이 주도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 문제는 다음 편에서

사료와 학설을 중심으로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남북국 시대 3 ― 발해의 건국 과정>이 계속됩니다.


― 초롱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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