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0

남북국 시대 1 ㅡ발해를 꿈꾸며 1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0

ㅡ 남북국 시대 1 ㅡ

(발해를 꿈꾸며 1)


*******************


2026년 병오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제 글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올 한 해에도 건강과 평안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병오년 새해를 맞아, 남북국시대 연재 첫 편 <발해를 꿈꾸며>를 시작합니다.


천 년 전, 발해는 고구려보다 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만주벌판을 무대로 존재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역사인식 속에서 발해는 오랫동안 주변부에 머물러 왔습니다.


발해는 단순히 사라진 한 왕조가 아니라, 고조선에서 시작된 우리 민족 만주지역 역사흐름이 어디서 멈추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남북국시대> 연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발해를 꿈꾸며>를 시작하는 올 한 해가 한반도에 조금이나마 더 단단한 평화가 자리 잡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ㅡ 초롱박철홍 올림 ㅡ


***********************


<발해를 꿈꾸며>는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의 타이틀곡으로 발표된 노래다.


아래는 그 가사의 일부다.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


한 민족의 형제인 우리가

서로를 겨누고 있고

우리가 만든 큰 욕심에

내가 먼저 죽는 걸


우리 몸을 반을 가른 채

현실 없이 살아갈 건가]


가사 어디에도 ‘발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곡 제목이 <발해를 꿈꾸며>인 이유는, 서태지가 <남북국시대> 병존구조, 즉 '통일신라'와 '발해'가 함께 존재했던 역사적 상황을 현대 남북분단 현실에 겹쳐 보았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갈라진 땅,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끝내 회복되지 못한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 이 노래 핵심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이 곡을 통해 서태지는 단순한 대중가수를 넘어, 사회현실과 역사문제를 고민하는 뮤지션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1. 발해는 왜 우리에게 낯선가


오늘날 발해는 교과서와 대중 담론 속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다.


필자가 초·중·고등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당시에도 발해는 매우 간략하게만 다뤄졌다.


-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 대조영이 건국


- 선왕 때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번영


대체로 이 정도가 전부였다.


200년 넘는 기간 존속한 분명한 한 국가였음에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발해는 건국시조 ‘대조영’ 정도만 떠오르는 존재였다.


발해와 대조영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결정적 계기는 2006년 방영된 KBS 드라마 <대조영>이었다.


이처럼 발해는 '고려'나 '조선'에 비해 우리 역사인식 속에서 상대적으로 희미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2. ‘남북국시대’ 인식의 형성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는 1784년 유득공의 저서 '발해고'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개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발해를 우리 민족사 일부로 적극 재평가하려는 흐름이 형성되면서부터다.


'신채호'를 비롯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들은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가로 보고, 통일신라와 동등한 위치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이 확산되면서

통일신라와 발해가 남과 북에서 병존하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인식하는 틀이 자리 잡게 되었다.


3. 발해가 역사 속에서 희미해진 이유


발해가 오랫동안 역사 속 주변부 머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고려와 조선 모두 자신들이 발해를 계승했다는 의식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는 통일신라 영토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지만, 발해 옛 영토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고려 태조왕건은 발해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 등 민족적 연대의식은 분명히 보여 주었다.


둘째, 발해자체에서 편찬한 사료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존재한 국가임에도 발해 공식기록은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4. 발해멸망과 기록소실 문제


발해는 고구려보다 넓은 영토를 지닌 국가였다. 그런 나라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멸망한 점은 여전히 많은 논의를 낳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거란침입이 멸망의 직접적 원인으로 설명된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10세기 초 백두산 일대 대규모 화산 분화가

발해 국가기반을 약화시켜 외부 침입에 취약한 상황을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만 이 가설은 발해멸망 직접적 원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며,

여러 요인 중 하나로 검토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자연재해 가능성은

발해기록과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5. 발해를 알 수 있는 자료들


현재 발해사는 주로 주변국기록과 고고학자료를 통해 복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속일본기'에는

'발해사신'이 일본을 방문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일부 문서에는 발해가 스스로를 ‘고려국’이라 칭한 사례도 확인된다.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는

발해 정치체제와 외교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거란의 '요사'에는 발해멸망 이후 유민들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발해사'는 외부시선으로 남겨진 기록과 제한적으로 남아 있는 유적을 종합해 조심스럽게 복원할 수밖에 없다.


자체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한 한계지만, 동시에 발해를 둘러싼 국제관계 모습을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발해’라는 국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을까.

왜 이 나라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을까.


이 이야기는 다음 편

<발해를 꿈꾸며 2>에서 계속 이어갑니다.


— 초롱박철홍 —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이전 27화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