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시대 34 ㅡ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9
ㅡ 삼국통일의 시대 34 ㅡ
(나당전쟁 5 ― 의미)
몇 차례 강조했듯이 <나당전쟁>은 한국사에서 가장 중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 가운데 하나다.
어느 독자가 '나당전쟁' 연재를 읽고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당나라에 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당나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신라까지 정복했다면, 한반도 전역은 중화질서 안으로 완전히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경우 우리 민족이 다시 세력을 회복해 한반도를 지배하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거란, 여진처럼 중국사 일부로 흡수되어 오늘날까지도 중국 변방으로 남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되었다면, 신라는 삼국 균형을 깨뜨리고 외세를 끌어들여 한반도를 중국 땅으로 넘긴 영원한 배반자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물론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삼국통일전쟁을 치른 데에는 분명한 ‘원죄’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당과 결별하고 '나당전쟁'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한민족 정치적·문화적 독자성을 지켜낸 점은 결코 평가를 낮출 수 없다. 실제로 통일신라는 이후 고려와 함께 동아시아 주요 강국으로 인정받았다.
1. 초강대국 당나라와의 전쟁
나당전쟁 당시 당나라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수준 초강대국이었다.
이에 비해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 변방국가 에서 막 삼한통합을 앞둔 단계였다.
군사력, 병력규모, 물자동원 능력에서 신라는 당에 현저히 열세였다. 그러나 전쟁 무대가 신라 본토였다는 점은 신라에게 결정적 강점이었다.
'문무왕'과 신라 지휘부는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해,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략과 기민한 전술 운용으로 전력차이를 극복했다.
결국 신라는 당 대군을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2. 우리가 과소평가해 온 '나당전쟁'
지금까지 나당전쟁은 ‘삼국통일 이후 당과의 소규모 충돌’ 정도로 인식되어 온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660년 백제 멸망 부터 676년 '기벌포전투'까지 약 20년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라, 한반도가 중국제국질서에 흡수될 것인가, 독자적 정치체로 남을 것인가를 가른 전쟁 이었다. 동시에 한민족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결정적 분수령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세계 최강국 명나라 지원을 받고도 일본군에 크게 고전했던 사실을 떠올려 보면, 외국지원 없이 단독으로 초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승리한 신라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현대사에 비유하자면, 제국주의 열강을 물리친 '에티오피아'나, 장기간 항쟁 끝에 소련군을 철수시킨 '아프가니스탄'에 견줄 만하다. 당시 당과 신라 전력 차이는 미·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베트남 정도로 볼 수 있다.
3. 전쟁 결과와 발해 탄생
결국 당나라는 신라에게 대동강 이남 지배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668년 멸망한 고구려 옛 영토에서는 698년 발해가 건국되며, 당은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마저 상실하게 된다.
당 고종 사후 서쪽에서는 '토번'이 강성해지고, 동북방에서는 고구려 유민· 거란·말갈 세력이 결집하자 당은 오히려 신라와 협력을 택 했다. 한때 신라와 당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공동전선을 형성 했으나, 이미 만주 지역 주도권은 발해에게 넘어간 뒤였다.
고구려 멸망 후 정확히 30년 만에, 고구려 장수 출신 '대조영'은 요동을 제외한 옛 고구려 고토에 자리 잡고 발해를 건국한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다시 만주를 지배하게 되었고, 역사는 '남북국시대'로 접어들었다.
4. 발해를 둘러싼 인식의 문제
과거 교육과정에서는 통일신라만 중심으로 서술하며 ‘남북국시대’라는 개념조차 널리 쓰이지 않았다. 이는 통일신라만을 정통으로 보려 했던 '유교적 역사관' 영향이 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그리고 조선 왕조 역시 '발해'를 우리 민족 국가로 명확히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 유득공의 '발해고'가 나오면서 비로소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지리적·문화적으로 볼 때 발해는 분명한 한민족 국가였다.
신라는 백제와 신라 통합이었고, 고구려는 멸망 이후 발해로 계승되었다. 발해는 국호를 ‘고려’로 하려 했을 만큼 스스로 고구려 후계국가로 인식했다.
5. 오늘의 의미
오늘날 발해사는 중국 동북공정으로 가장 큰 위협을 받고 있다. 고구려는 국제적으로도 한민족 국가라는 인식이 비교적 확고 하지만, 발해는 여전히 중국·러시아에서는 중국 변방 국가로, 외국학계에서도 애매하게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자칫하면 발해라는 뛰어난 국가를 역사 속에서 빼앗길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당전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발해에 대한 연구를 더욱 깊이 있게 이어가는 일이 중요하다.
6. 맺으며
나당전쟁 이후 발해 3대 문왕 시기에 이르러 발해·신라·당의 외교관계는 정상화되었고, 동북아 에는 오랜 평화가 찾아왔다. 신라와 당 관계는 오히려 전쟁 이전보다 안정되었으며, 당나라 안에는 '신라방'과 같은 교류거점도 형성되었다.
이로써 삼국통일의 시대는 마무리된다. 기록이 부족해 가장 정리하기 어려운 고조선부터 삼국통일까지 고대사를 약 100편 가까이 정리해 온 스스로 노고에 오늘은 작은 칭찬을 해본다.
다음 편부터는 '남북국시대', 발해 건국 편이 이어집니다.
— 초롱박철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