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전쟁’ 4 - 과소평가된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왕)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8
ㅡ 삼국통일의 시대 33 ㅡ
( ‘나당전쟁’ 4 - 과소평가된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왕)
이번 ‘나당전쟁’ 시리즈에는 내 개인적인 문제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 이유는 신라가 <나당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국제정세와 전략적 처지가 앞으로 대한민국이 직면할 수도 있는 미래상황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북한 급작스러운 붕괴, 중국 대만 침공으로 촉발되는 동북아 전쟁, 혹은 미국 대북핵시설 선제타격과 같은 사태는 더 이상 추상적 가정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북한지역 둘러싸고 한국·중국·미국이 각각 어떤 선택하게 될 것인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질문이 된다.
실제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북한 급변사태 이후 한반도 분할 시나리오와 구체적인 지도까지 논의되고 있다.(아래 마지막사진)
이런 점에서 <나당전쟁>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강대국 질서 속에서 한반도가 어떤 선택 강요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이 비교는 당시 국제 제도나 상황이 지금과 동일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7세기와 21세기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놓인 중견국, 동맹 이후 종속위험, 통일 이후 외세개입 문제라는 구조적 조건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1. 통일의 ‘완성’이 아닌, 통일의 ‘생존’
삼국통일 주역을 떠올리면 우리는 흔히 '김유신'이나 '김춘추'를 먼저 말한다. 이는 틀린 평가는 아니다.
삼국통일에 대해 김춘추는 외교적 설계를, 김유신은 군사적 실행을 담당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삼국이 통일된 뒤, 그 통일은 과연 지속가능한 상태였는가?”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진 직후,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자국 군현체제로 편입하려 했다.
백제지역에는 '웅진도독부'가, 고구려지역에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고, 신라 역시 '계림대독부' 설치로 예외가 아니었다.
즉, 삼국통일은 완결이 아니라 새로운 위기의 시작이었다.
이 시점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신라 제30대 왕 <문무왕>이다.
'문무왕'을 단순히 “이미 짜인 판을 마무리한 왕”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는 통일을 영토통합으로만 이해한 결과다.
통일은 점령으로 끝나지 않는다.
통일은 외세간섭 없이 하나의 정치질서가 존속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 ‘생존책임’을 떠안은 인물이 <문무왕> 이었다.
물론 문무왕이 맞닥뜨린 현실에서 전쟁을 피하며 형식적 종속, 조공 강화, 당군주둔 수용과 같은 우회적 선택지도 존재했다. 실제로 동아시아 많은 국가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생존했다.
그럼에도 문무왕은 그러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길이었지만, 그 길은 우리 민족 역사 속에서 가장 정당한 선택이었다.
670년, 그는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 군을 연합해 요동지역을 공격하며 <나당전쟁> 포문을 열었다. 이는 당 압박에 떠밀린 방어전이 아니라 주권을 되찾기 위한 선제적이고 주도적 전쟁의 시작이었다.
물론 이 전쟁에는 국제정세라는 구조적 요인도 작용했다.
당나라는 중국 쪽 서방전선 부담, 내부반란, 보급문제로 인해 신라에만 전력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조는 기회를 제공할 뿐, 결정을 대신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 상황에서 싸우기로 결정한 주체는 <문무왕>이었다.
2. 잃은 땅보다 지켜낸 것
7년에 걸친 <나당전쟁> 끝에, 676년 '기벌포전투'에서 신라는 당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당의 군사·행정 조직은 한반도에서 사라졌고, 신라는 외세간섭 없는 독립국가로 통일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대동강이북과 만주지역을 상실했다. 이 때문에 통일을 ‘불완전한 삼국통일’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당시 선택지는 명확했다.
당의 군현지배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축소된 영토일지라도 자주적 국가존속을 할 것인가?
문무왕은 후자를 택했다.
이는 영토확장 실패가 아니라, 주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축소였다.
광개토대왕이 정복군주로서 ‘확장'의 위대함이라면, 문무왕은 ‘보존과 생존’의 위대함을 보여준 군주였다.
3. 문무왕, 김법민이라는 인간 그리고 결단 배경
문무왕 본명은 '김법민'이다.
그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 아들이자, '김유신' 외종질였다.
김법민 여동생 '김고타소'는 '대야성전투' 에서 남편 '김품석'과 함께 백제군에게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김춘추와 김법민 부자에게 깊은 상처이자 복수의 기억으로 남았다.
660년, 태자였던 김법민은 김유신과 함께 백제정벌에 직접 참전했다.
이때 포로로 잡힌 백제태자 '부여융'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는 장면이 '삼국사기'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의 복수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준다.
661년, 백제멸망 1년 후, 김춘추가 죽자 김법민은 즉위하여 문무왕이 되었고, 이후 그의 선택,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국가존망을 건 결단으로 이어진다.
4. 문무왕, 전쟁 이후 국가경영
문무왕 치적은 전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옛 백제·고구려 지역을 체계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9주 5 소경' 체제 기반을 마련했고, 이는 통일신라 통치안정 핵심이 되었다.
또한 <나당전쟁>을 통해 해군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안방어와 수군정비에 힘썼다.
그가 남긴 “동해에 묻히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은 설화이기 이전에, 평생의 그의 국가관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은 다시 외교 관계를 회복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종속이 아닌 대등한 관계였다.
당나라에 '신라방'이 설치되고 교류는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5. 문무왕, 우리가 다시 불러야 할 이름
그럼에도 <문무왕>은 김유신이나 김춘추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아왔다.
통일의 과정은 기억되었지만, 통일을 지켜낸 선택은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문무왕은,
나당전쟁을 결단했고,
당과 전면전을 감행했으며,
통일 이후 생존체제를 완성한 인물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문무왕을 우리 역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군주로 평가한다.
<광개토대왕, 문무대왕, 세종대왕>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이라 부르듯, 문무왕 역시 ‘문무대왕’이라 불려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내 개인적으로는 본다.
<문무왕>은 잊힌 왕이 아니라,
강대국 질서 속에서 주권을 선택했던 왕이며, 우리가 오늘 다시 불러내고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