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7

( ‘나당전쟁’ 3 - 신라 선제공격과 전투들)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7

ㅡ 삼국통일의 시대 32 ㅡ

( ‘나당전쟁’ 3 - 신라 선제공격과 전투들)


<나당전쟁>은 ‘살수대첩’이나 ‘안시성 전투’처럼 단 한 번 전투로 승패를 결정한 전쟁이 아니다.


서기 670년, 신라는 고구려 부흥 군과 연합하여 요동을 선제 공격하며 <나당전쟁> 시작했다. 676년 '기벌포전투'로 끝날 때 까지 약 7년 동안 이어진 긴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고려 '몽골침략', 조선 '임진왜란' 과 함께 우리 역사에서 손꼽히는 장기전쟁 이다. 신라가 초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승리한 드문 사례이다.


이 승리로 신라는 한반도 지배를 공고히 하고 한민족 동질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한반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다만 <나당전쟁> 중 벌어진 많은 전투들은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나당전쟁>은 민족사적으로 훨씬 중요하다. 그러나 장기전· 전략중심· 단편기록, 승패가 갈린 많은 전쟁들 때문에 현대에서 ‘극적사건·영웅중심’과 맞지 않아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삼국사기 등이 유교적 관점에서 기술된 것도 그 원인 중 하나다.


아래 주요 전투중심으로 전개를 정리했다.


1. 옛 백제 땅 전투와 석성전투


1) 671년 6월, 석성전투


신라군은 당군 5,300명을 격파했다. 백제계 당 장군 2명과 당 장수 ‘과의’ 등 6명을 사로잡았다.


당군은 신라군 공세에 더 이상 힘쓰기 어려웠다. 이에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한다


이에 신라는 '강수'의 ‘답설인귀서’를 보내 독립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며 정당성을 확보했다.


2) 신라의 전략적 조치


- 소부리주(옛 사비성) 설치

-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

- 당군 공격 대비 병력 배치


등등 신라는 이러한 신라군 움직임 일부를 회유전략으로 은폐했다.


3) 기타 전투


- 10월: 당 수송선 70여 척 격파,

당 장군 1명·군사 100명 포획


- 672년 1월: 웅진도독부 고성성 점령


- 2월: 가림성 공격 실패 (난공불락 요새)


4) 요약


신라는 옛 백제 지역에서 전략적 승리를 이어가며 당군 기세를 꺾었다.


2. 옛 고구려 땅 전투와 석문전투


1) 안시성 함락 (671년 7월)


당군 '고간'이 이끄는 군대가 고구려부흥군을 격파하고 안시성을 함락시켰다.


2) 석문전투 (672년 8월)


신라군은 고구려부흥군과 연합해 당군을 공격했지. 그러나 유인계에 넘어가 지휘관 7명이 전사한다.


이 전투 패배 책임을 지고 김유신 아들 '김원술'은 옥쇄를 시도하나 부관들 만류로 실패했다. 김유신은 이에 아들과 의절까지 한다.


3) 문무왕의 대응


석문전투 실패로 문무왕은 충격을 받아 중신회의를 소집한다. 그리고 수비중심 전략으로 대응하기로 한다. 또한 문무왕은 기습공격과 당군에 대한 외교적 서신도 병행한다.


4) 672년 백수산전투


672년 12월에 '백수산전투'에서 당의 '고간'이 고구려부흥군과 싸워 이겼다. 신라는 군대를 보내 고구려부흥군을 지원했으나, 역으로 '고간'에게 패하여 신라군 2,000명이 죽거나 사로잡히고 말았다.


5) 673년 호로하전투


673년 5월에 당 장수 '이근행'이 '호로하전투'에서 고구려부흥군 격파하고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나머지 무리는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신당서'에서는 이 호로하전투 에서 죽거나 붙잡힌 고구려인이 10,000명에 달하며 "고구려멸망 후 무려 4년 만에 평정 되었다"라고 따로 쓰고 있다.


당은 이 '호로하전투'를 기점으로 고구려부흥군을 정말 제압했다고 판단한 듯 하다.


6) 요약


고구려부흥군 지원과정에서 신라군은 일부 패배했지만, 전략적 수비와 외교로 장기전투를 이어갔다.


3. 당군남하와 신라방어


1) 673년 겨울


당군은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을 함락했다.(경기도 김포까지 당군 진출)


2) 674년


신라는 임진강선을 중심으로 당군과 장기대치에 들어간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을 옛 백제지역 수비군으로 활용하고 성곽증축을 해 수성을 강화했다


3) 이때쯤부터 당군은 티베트군 (토번) 공격 등으로 한반도 전선에 집중한다. 이에 당군은 신라공격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4) 요약


전선안정과 수비강화로 신라는 장기적 생존기반을 확보한다.



이후 신라가 7년 간이나 길고도 끔찍한 <나당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전투인 '매소성전투'와 '기벌포전투'가 벌어진다.


이 두 전투가 <나당전쟁> 결정적 승패를 좌우한 전투였다. 우리 역사 속에 남을만한 대승이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4. 매소성전투 (676년)


당군 이근행 20만(실제 4만 추정) 대군이 공격해 왔다. 신라군은 군마 30,380 필과 병기 다수 획득하며 대승을 거둔다.


당군병력이 20만이라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요즘에는 의심받고 있다.


20만은 <나당전쟁> 7년 기간 동안 투입된 모든 당군 총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요 전투 매소성전투를 기록할 때 상징적으로 20만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매소성전투 근래 수정적인 관점에서는 중국 측 기록에 따라 당군을 대략 4만 명 전후로 보고 있다.


이후 당군 일부는 칠중, 적목, 석현성을 공격한다. 신라군은 18차례 전투에서 약 6,047명 당군을 사상시켰다.


매소성전투는 나당전쟁 분수령이 된 전투 였다. 신라가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676년 7월의 '도림성'(강원도 통천군) 전투에서 신라군 장수 '현령 거시지'가 전사한다. 그러나 신라군은 이 전투를 잘 막아냈고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한반도 육상에서 7년이란 기나 긴 <나당전쟁>은 끝이 났다.


5. '기벌포전투'


676년 3월, 당나라는 대륙 반대편 서쪽에서 공격해 오는 토번군(티베트 고원에 성립)과 맞서게 되었다. 토번군은 617년부터 842년까지 약 200년간 티베트 지역에서 존재했다. 토번군이 670년경에 발흥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당시 당나라는 한반도 보다 토번 지역문제에 더 신경을 쓴다. 이로 인해 신라군과 '매소성전투'에서 패배를 겪게 되었다. 결국 당나라 군은 신라 전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철수준비를 시작하였다.


676년 11월, 신라군은 바다를 건너 철수 하려는 당군을 소부리주 '기벌포' (금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항구. 충남서천)에서 공격한다. '설인귀' 당 수군에 의해 신라군이 처음에는 패배했다.


신라수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가해 승리한다. 당군 4천여 명 수급을 베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기벌포전투'를 끝으로 당나라는 사실상 패전한다. 당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 한다. 당은 구 백제 땅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웅진도독부'도 이때 요동으로 철수시킨다.


이에 7년 간에 걸친 기나긴 <나당전쟁>은 끝이 났다.


<나당전쟁>에서 참패하고도 '당고종'은 한반도 전역을 정복하겠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입장에서도 '한사군'시기와 더불어 중국이 한반도를 정복해 직할령으로 삼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것이다.


'구당서' '장문관열전'에 의하면 <나당전쟁> 패배 이후에도 신라를 다시 공격하자는 논의가 당나라 내에서 꾸준히 있었다.


이때 와병 중이던 '장문관'이 나서서 토번과 신라 '양면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한다. 당고종은 결국 장문관 간언을 받아들여 계획을 전격 철회했다.


그리고 이후 683년 당고종 사망, 후계자 문제 혼란, 측천무후 즉위로 '무주' 건국 등 당나라 본인 내부사정이 어수선해지면서 결국 신라 재공격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서 <나당전쟁 5 문무왕 편> 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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