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6

( ‘나당전쟁’ 2 - 신라가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6

ㅡ 삼국통일의 시대 31ㅡ

( ‘나당전쟁’ 2 - 신라가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우리 대부분은 신라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 느낀다. 나 역시 오랫동안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반쪽짜리 통일’로만 인식해 왔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와 신라의 선택지를 냉정하게 살펴보면, 이 문제는 단순한 민족적 배신이나 도덕문제로만 생각하기 어렵다.

신라 선택은 결코 이상적인 선택 아니었지만, 당시 조건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다.


중요한 점은, 신라가 당을 끌어들였다는 사실보다 이후 신라가 당의 야욕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대응했는 가이다.


그러한 점을 자세히 살펴본다.


1. 신라의 선택


7세기 중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라는 두 강국에 동시에 맞서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왕권 강화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는 당이라는 초강대국이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고 있었다.


신라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했다.


- 백제·고구려와 공존 또는 균형 외교


- 백제 또는 고구려 중 한 국가와 전략적 동맹

(고구려와 실현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 당과 연합을 통한 단기적 군사 해결


신라에게 이 중 어느 선택도 이상적이지 않았다. 다만 신라 지배층은 단기간 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선택으로 당과 연합을 택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장기적 위험을 내포한 선택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계산된 결단 이었다. 즉, 신라 선택은 ‘불가피한 유일한 길’이라기보다는 위험을 감수한 '현실적 판단'에 가까웠다.


2. 백제멸망 이후 당의 태도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은 신라 기대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인다.


백제 전역을 다섯 조각으로 나눠 <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

5도독부로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다.

이 중 '웅진도독부'가 중심이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나라는 포로로 끌고 갔던 백제태자 '부여융'을 다시 백제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를 '웅진도독부' 책임자로 임명한다.


신라 눈에는 이 장면이 어떻게 보였을까?


“백제가… 다시 살아난 건가?”


당나라는 백제에서 멈추지 않았다.


663년,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규정,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한다.


신라를 당의 행정체계 안에 넣겠다는 선언 이었다.


물론 신라는 예전처럼 독립국이긴 했었다. 하지만 상징은 중요했다.


“너희도 우리 아래다.”


당의 이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했다.


신라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당나라와 맞설 힘은 없었다. 피눈물 흘리면서 그저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664년과 665년, 백제와 신라가 다시 싸우지 않는단 명분으로 <웅령회맹, 취리산회맹>을 강요한다.


문무왕은 격분했다.


660년, 백제태자였던 '부여융' 얼굴에 침을 뱉었던 그였다. 지난 '대야성전투'에서 백제군이 죽인 여동생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부여융과 ‘화해의 맹세’를 하라니 문무왕은 '웅령회맹'에 직접 나가지 않는다. 대신 신하를 보낸다.


“내가 너와 같은 자리에 설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나라는 이 행동에 분노한다.


그리고 더 노골적인 방법으로 압박해 665년 8월, 웅진 '취리산'에서 사실상 강제회맹이 이루어진다.


땅의 경계를 정하고, 백성을 나누어 다스린단

맹세. 그 맹세문은 '금서철계'에 기록되어 신라종묘에 보관된다.


신라 입장에서 이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간신히 멸망시킨 백제가 5년 만에 되살아난 것이었다.


당나라 의도는 분명했다.


'신라의 백제영토 진출차단'


필요하면 신라도 백제처럼 만들 수 있다는 경고였다.


문무왕은 참으며 치욕을 삼켰다. 아직은 싸울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결론이 내려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3. ‘나당연합’ 해체


당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규정하고 신라 '문무왕'을 대도독으로 책봉했으며, 신라장수 임명, 병력징발, 군량수송까지 당이 직접 통제했다.


이는 명백히 동등한 군사동맹이 아니라 '종속적 군사협력체제'였다.


당은 신라와 작전정보도 공유하지 않았고, 신라군은 늘 사후통보를 받는 위치에 놓였다. 심지어 신라 왕이 직접 참전해도 작전권은 당이 독점했다.


이 시점에서 ‘나당연합군’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다.


4. 신라의 고구려 멸망 참여


신라는 당에 의한 이런 지저분한 상황을 단순히 견디기만 할 존재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문무왕은 당 의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 공격 대해서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고구려가 존속하는 한, 당은 신라를 직접 압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라에게 고구려는 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완충지대 였다. '순망치한'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 내부 급격한 분열은 신라 계산을 무너뜨린다. 신라가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고구려가 붕괴하자, 신라는 상황에 끌려가듯 전면전에 참여하게 된다.


668년 신라군은 남쪽에서 북진해 평양성을 함락시킨다. 신라의 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신라는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 행위자 중 하나였다.


이 점에서 신라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였다.


5.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멸망 직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며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한다.


이에 대해 신라는 즉각 대응한다.


- 고구려 유민 포섭


- 고구려부흥군 지도자 검모잠·안승과 협력


- 고구려부흥군에 군량과 병력 지원


이는 신라와 고구려부흥군 간에 감정적 연대가 아니라 명확한 이해관계 결합이었다.


고구려 유민에게 당은 침략자였고, 신라에게 당은 다음 차례의 위협이었다.


이 시점에서 신라와 당 사이에는 더 이상 공동 목표가 존재하지 않았다.


6. 결론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룩했지만, 모든 것을 얻지는 못했다.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했으나 신라는 그 영토를 온전히 확보하지 못했고, 대신 ''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남았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는 외세를 끌어 들이는 선택을 했고, 이는 분명한 한계이자 위험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라는 한반도까지 삼키려는 당의 팽창야욕을 인식했고, 이에 맞서기 위한 계산된 선택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당전쟁'을 통해 당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책임 있는 결단을 내렸다.


'나당전쟁'은 신라의 위대한 업적이었지만, 신라가 통일대가로 반드시 치러야 했던 역사적 책임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당전쟁'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주체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아주 위대한 의미 깊은 전쟁이었다.


이제 나당전쟁 과정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다음 편 '나당전쟁 3' 이어집니다


― 초롱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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