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5

남북국 시대 6 ㅡ 발해와 통일신라의 관계)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5

ㅡ 남북국 시대 6 ㅡ

(발해와 통일신라의 관계)


2025년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 80년이 되는 해이다. 분단 5년 만에 동족상잔 비극인 한국전쟁을 겪었고, 이후 남북은 지금까지도 휴전상태 속에서 왕래 없이 적대적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약 1300년 전에도 우리 민족국가 '발해'와 '통일신라'로 나뉘어 존재한 적이 있다.


두 나라는 8세기부터 10세기 초까지 약 200년 이상 한반도와 만주일대에서 공존했으며, 우리는 <남북국시대>라

부른다.


그렇다면 남북국시대 당시 발해와 통일신라 관계는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나라 관계는 경쟁과 대립을 기본으로 하되, 직접 충돌은 제한적이었고, 간접적 교류가 공존한 관계였다.


이제 그 관계를 분야별로 살펴보자.


1. 대립적 관계


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 계승국가로 자처하며 옛 고구려 영토, 즉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을 자신 영역으로 인식했다.


반면 통일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룬 국가로서 한반도 전역에 대한 통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처럼 두 나라 국가 정체성과 영토인식은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발해 남부 지역과 신라 북부 접경지대에서는 지속적인 군사적 긴장이 유지되었다. 일부 국경분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양국 간 대규모 전쟁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전쟁으로 이어질 뻔한 사례 존재한다.


발해 2대 왕 '무왕' 시기, 발해가 영토 확장 과정에서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자 당은 신라에 발해 공격을 요청했다. 신라는 출병을 준비했으나 폭설로 인해 원정이 중단되었다.


또한 일본이 발해에 신라를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이때 발해는 일본 제안을 거절했다.


이처럼 양국은 직접적인 대규모 전쟁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 이유로는


1) 발해 중심지인 만주와 신라 중심지 한반도 남부사이 지리적 거리가 너무 멀었다.


2) 발해와 신라 국경선은 험준한 산맥과 자연 장벽으로 이루어졌다.


3) 발해, 신라 두 나라 모두 오랜 전쟁으로 인한 국가적 피로감 등이 심했다.


이러한 이유로 두 나라는 직접 충돌보다는 외교적 견제와 간접 갈등을 선택했다.


2. 외교적 관계


발해와 통일신라 사이 공식외교 교류 기록은 극히 제한적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통일신라는 '원성왕'과 '헌덕왕' 때 단 두 차례 발해에 사신을 보낸 기록만이 확인된다.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 두 번 사절 교환만 있었다는 점에서 양국 간 공식 외교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나라는 서로 같은 민족국가로 인식하기 보다는, 서로를 불편한 경쟁자이자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발해와 신라는 모두 당나라와 활발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를 통해 당을 왕래하던 사신, 승려, 상인들이 양국 문물과 정보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양국 모두 일본과 교류했기 때문에, 일본 역시 중요한 간접교류의 매개였다.


다만 당나라에 대한 외교 전략은 차이를 보였다.


1) 발해는 초기에는 당과 대립했으나 중기 이후에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당과 외교관계를 적극 활용했다.


2)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당을 물리친 경험을 바탕으로 당에 대해 비교적 자주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선진문물은 선택적으로 수용했다.


3. 문화적 교류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발해와 통일신라는 간접적인 문화 교류를 통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고, 신라는 고구려 유민과 접촉을 통해 고구려 문화 요소를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두 나라는 문화적으로 상당한 동질성을 유지하고는 있었다.


또한 발해가 중국과 일본을 통해 수용한 문화가 신라로 전해지거나, 반대로 신라 문화가 발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4. 경제적 교류


발해와 신라 간 경제교류 역시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발해는 일본과 중국을 잇는 해상 무역을 통해 모피, 인삼, 말 등의 산물을 수출했고, 신라는 금, 도자기, 직물 등을 생산했다.


이러한 물품들이 국경지역이나 일본을 매개로 교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5. 자유 왕래


양국 간 자유로운 왕래는 거의 없었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신라와 대립했기 때문에 신라인 출입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신라 역시 북방세력인 발해를 경계하며 접촉을 제한했다.


또한 백두산을 비롯한 험준한 산악지형은 물리적으로도 왕래를 어렵게 만들었다.


6. 언어와 소통


발해 지배층은 고구려계통 언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신라와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다만 발해 주민 다수는 말갈·거란 등 북방 민족 출신이었기에, 일상 언어에서는 차이가 존재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만주지역 언어는 같은 고대한국어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기본적 소통에는 큰 장벽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발해와 신라는 모두 한자를 공식문자로 사용했기 때문에 외교문서와 기록을 통한 의사전달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7. 결론


발해와 통일신라는 서로를 경계하고 견제하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지만, 그 강도와 방식은 시대와 외교환경에 따라 달라졌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국가로서 북방과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외교적으로도 신라를 배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로 인해 발해의 대외태도는 상대적으로 공격적이고 확장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통일신라는 발해를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했지만, 당나라와 왜구라는 더 큰 외부 요인에 대응해야 했기 때문에 발해에 대해서는 방어적 태도를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 관계는 직접 충돌보다는 외교적 견제와 간접 교류가 중심이 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을 매개로 문화·경제적 영향이 오갔다.


발해와 통일신라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각자 방식으로

고구려와 신라 문화를 계승·발전시켜, 동아시아 역사와 문명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어서 <남북국 시대 7>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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