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6

남북국 시대 7ㅡ세계 속에서 빛났던 한반도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문화와 생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96

ㅡ 남북국 시대 7ㅡ

(세계 속에서 빛났던 한반도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문화와 생활상)


우리는 모두 각자 시대운을 안고 태어난다. 물론 개인운이 시대 한계를 뛰어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시대에 태어났는가는 우리들 삶의 출발선 자체를 바꾼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 대한민국이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풍요롭고 안정된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큰 행운이다. 한, 두 세대만 앞당겨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라 잃은 식민지를 겪고, 6.25 전쟁과 배고픔의 시대를 통과해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격동의 시기를 제외하고 우리 역사 전체를 조망해 보면, 장기간에 걸쳐 비교적 안정과 번영을 누렸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 역사 속 그런 시대 중 하나로 '통일신라시대'를 떠올릴 수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7세기 후반부터, 후삼국 혼란이 시작되기 전 9세기말까지 약 200여 년. 이 시기는 단순히 영토적, 정치적 통일을 넘어, 문화·경제· 도시문명이 성숙단계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 평가라기보다

당시 세계 속에서 통일신라가 차지했던 위치를 기준으로 한 상대적 평가다.


그 이유를 차분히 살펴보자.


1. 동아시아 상위권 대도시, 서라벌


통일신라 수도 '서라벌'(경주)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삼국유사'에는 전성기 서라벌에 17만 8천여 호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수치를 그대로 적용할 경우 백만에 가까운 인구의 상당한 규모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호(戶)’가 정확히 어떤 단위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쟁이 있다.


실제 서라벌 인구는 수십만 명 규모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가 비교적 신중한 평가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콘스탄티노플'·'장안'같은 초거대 도시가 존재하던 세계에서 '서라벌'은 규모 면에서는 장안과 차이가 있었으나 동아시아 질서 속 핵심도시였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고려·조선시대 수도와 비교해도 이례적인 규모였다.


2. 계획된 왕도(王都), 서라벌의 도시구조


통일신라 번영은 단순히 인구규모 에만 있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발굴·연구가 이어지는 왕경유적을 보면, 서라벌 중심부는 분명한 계획도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도로는 일정한 규격을 갖추었고 정비되었으며, 배수시설과 우물도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도시 중심부에서는 일정한 구획이 확인되는데, 이는 행정·의례·주거 공간이 일정한 질서 속에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문헌에는 골목과 집을 기준으로 위치를 설명하는 기록도 등장하는데, 이는 오늘날 주소체계와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도시공간에 대한 인식과 관리가 상당히 발전해 있었음을 시사한다.


주거문화 역시 흥미롭다. 일부 발굴유적 에서는 전통적인 온돌 시설이 확인되지 않는 대신, 풍로와 숯 사용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통일신라 서라벌 도시 일부계층은 이동식 난방기구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연기와 그을음이 적은 쾌적한 실내환경을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금입택’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일부 귀족층의 호화로운 생활은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3. 조선보다 앞선 국제성과 개방성


우리는 흔히 조선을 기준으로 ‘전근대 사회’를 상상하지만, 국제교류와 개방성 측면에서는 통일신라가 오히려 더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가 일본에 전해진 '매신라물해'다. 이 문서는 일본 귀족사회에서 신라물품이 어떤 방식으로 거래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문서 분석에 따르면 신라물품은 일본에서도 상위 귀족계층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고급문화 상징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문서에 기록된 물품들이 단순히 신라산 제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남아산 향료, 중국산 비단, 서역 계통 물품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가 단순한 수출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해상교역망 중간 허브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4. 아랍·이슬람 세계가 바라본 신라


통일신라에 대한 인식은 동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아랍과 이슬람세계 지리서와 역사서에는 신라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들 기록에서 신라는 “중국 동쪽 끝에 위치한 풍요롭고 살기 좋은 나라”로 묘사된다.

“공기가 맑고, 물과 땅이 좋으며, 사람들의 성품이 온순하다.”

“금이 흔하다고 전해지는 부유한 나라.”


이는 실제 관찰이 아니라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된 이상화된 이미지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신라가 멀리 서방세계에까지 ‘풍요로운이상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막과 초원이 중심인 문화권에서 바라본 한반도 자연환경과 경제력은 충분히 선망 대상이었을 것이다.


5. 중세세계 속 통일신라


중세 아랍문헌에는 신라와 당나라 관계가 언급되며, 두 나라가 선물을 교환하지 않으면 재앙이 온다는 식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신화적 표현이지만, 그 이면에는 상호교류와 외교관계 중요성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는 당시 세계 질서 속에서 단순히 한반도를 통일한 고립된 변방국이 아니었다


통일신라는 전쟁의 시대를 지나 안정에 이른 그곳에서는 예술과 건축이 조용히, 그러나 깊고 단단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 가운데에서도 통일신라 유물들이 유독 눈부시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국사 기단을 오르며 마주하는 장엄함, 다보탑과 석가탑에 스며든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 석굴암 본존불 앞에 서면 느껴지는 고요한 숭고함은 천여 년의 시간을 넘어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금동관' 하나에도 그 시대가 꿈꾸었던 세계 모습이 담겨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통일신라를 교과서 속 이름으로 쉽게 지나 친다. 그러나 당시 세계 시선 속에서 통일신라는 분명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안정된 정치 구조, 발달한 도시 문명, 활발한 해상 교역, 국제적 인지도를 갖춘 국가였다.


물론 신라는 귀족중심사회로, 또 '골품제' 라는 엄격한 신분제로 인해 개인의 사회적· 정치적 상승에 한계가 있었다. 또한 서라벌에 권력과 자원이 집중되면서 중앙과 지방 간 정치· 경제·문화적 격차도 크게 나타났다.


통일신라 후기 에는 중앙정치가 약화되고 지방세력이 성장하며 귀족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분쟁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통일신라라는 바람과 돌, 금속과 신앙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문명은, 오늘날까지도 조용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웠다”라고.


다음 편에서는 이 통일신라와 나란히 동아시아 북방에서 번영했던 발해 생활상과 문화를 이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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